지구의 온기에 안겨, 후사빅 외 – 아이슬란드 겨울여행 #7

후사빅, 아쉬운 안녕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이슬란드의 아침은 고요했다

 

겨울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는 역시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거다. 기분 좋게 무거운 거위 털 이불을 걷어내고 창가에 섰다. 유리창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고요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여압실에서 칠흑 같은 우주를 바라보는 우주인이 된 것 같았다.

 

감상도 좋지만 역시 아침은 배부터 채워야 했다

 

쓸데없는 감상에서 나를 깨운 것은 허기였다. 밤새 라디에이터에 널어놓아 빳빳하게 마른 울버린 워커를 구겨 신고 식당으로 향했다. 잘생긴 아이슬란드 청년이 차려놓은 아침을 해치우고 숙소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르볼(Árból)’이 혹시 당신 이름이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한다. 그건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뜻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스케쥴은 숙소 인근 후사빅(Husavik) 항구를 구경하고 미바튼(Myvatn)으로 이동한 뒤 흐베리르(Hverir) 지열 지대를 거쳐 미바튼 네이처 배스(Myvatn Nature Bath)까지다. 자연온천을 즐기며 여행 막바지의 피로를 풀려고 한다.

 

사고난 차량을 보니 내가 다 안타까웠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오는 길에 어제저녁 빙판길에 미끄러진 차를 다시 만났다.  렌터카 교체 때문에 꼬일 게 분명했다. 수리비용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다. 겨울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렌트카 비용만큼은 절대 아끼면 안 된다는 교훈이 다시 떠올랐다.

 

동네 빵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동하면서 먹을 빵을 사기 위해 숙소 근처의 베이커리에 들렀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 빵집은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육의 양식 샌드위치와 당을 보충해줄 초콜릿시럽이 잔뜩 발린 빵을 골고루 샀다.

웨일와칭센터 옆에 주차된 폭스바겐 E-골프 전기차. 전기차는 추운 지역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쓸만할는지.. 홍보용인지는 몰라도 주유구에 꽂힌 얇은 전선이 이색적이었다.

 

고래와 인연 또는 악연이 깊은 후사빅

 

동생이 찍었던 고래들의 벽. 이곳은 후사빅에서 꼭 들려보고 싶었던 장소였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관광안내센터 옆으로 항구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나면 발견할 수 있다. 추운 날씨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없었다.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서 찍은 컷이다.

 

길게 뻗어 있는 물체는 고래 늑골이다

 

현재 후사빅은 고래 투어(웨일 와칭)처럼 관광도시로 유명하지만 사실 과거에는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다. 1989년 이후부터 국제포경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포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구 목적의 포경이 다시 시작됐다. 현재는 상업적 포경까지 이뤄지고 있어서 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사진은 어항 부근에 있던 고래의 늑골이다.

 

선창작에서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후사빅 항구의 모습, 지난밤 레스토랑에 붙어 있던 글귀처럼 FRP(강화플라스틱)로 구성된 배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착장에 가만히 서 있으면 나무로 만들어진 배들이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 거리는 소리를 만든다. 기분 좋은 소리다. 잉크병을 가득 채운 푸른 잉크처럼 진한 빛을 가진 바다. 이 바다를 건너면 세계 최대의 섬 그린란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빡빡한 일정을 채우고 다시 레이캬비크로 돌아가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후사빅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지만 항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후사빅에서 유명한 피쉬앤칩스(딱히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설도 있음)는 끝내 맛보지 못했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후사빅을 떠났다

 

괜히 방파제 위에 올랐다가 쉬고 있던 물새들을 놀라게 했다. 나도 깜짝 놀라 들고 있던 Nikon SP의 셔터를 눌렀다. 소란스러운 인사가 돼버리고 말았다. 안녕, 후사빅!

 

 

다이나믹 아이슬란드

 

끝없이 펼쳐지는 설경, 10월 말일 뿐이지만 아이슬란드 북부는 어디를 가도 눈밭이다

 

어제 늦은 시간에 지나가느라 들리지 못했던 에메랄드빛 호수에 도착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곳은 비자르나플라그 지열발전소(Bjarnarflag Geothermal power plant/Blue lake)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열 발전소는 1969년부터 운영됐다. 지열로 물을 데워서 증기를 만들어내는데, 연간 18GWh의 전기를 생산한다.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곳곳에서 솟아오른다

 

블루레이크의 뜨거운 물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는 지면으로 오는 순간 얼어붙는다. 호수의 전경, 저 멀리 지열발전소의 모습이 보인다. 엄청난 양의 뜨거운 스팀이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마치 구름처럼 하늘로 솟아오르는 수증기가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그레요타그야 동굴온천

 

북부 아이슬란드의 빼놓을 수 없는 스팟인 그레요타그야 동굴온천(Grjótagjá cave). 북부 지대는 대부분 관광지가 몰려 있는 편이다. 이곳저곳을 바쁘게 들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다. 그레요타그야 동굴은 왕좌의 게임 시즌3에 나오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특유의 신비로운 물빛과 청록빛 바위가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 독특한 컬러는 계절, 시간,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는 온천욕을 금지하고 있지만 1980년대 크라플라(Krafla) 화산이 분출하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용한 노천탕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수증기가 가득 차 있었고 빛도 거의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기대했던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동굴 내부는 후끈한 기운이 가득했다.

 

거대한 크기의 흐베르프잘 분화구

 

동굴온천 밖으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흐베르프잘(Hverfjall) 분화구가 보인다. 2,800년 전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이 분화구는 아이슬란드에서 4번째로 큰 분화구란다.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내비게이션으로도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 포기했다.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기다란 선이 등산로이다.

 

다이나믹한 아이슬란드를 만날 수 있다

 

흐베리르 지열 지대. 지층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마그마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끓고 있는 펄 사이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온다. 썩은 달걀 냄새를 풍기는 유황가스가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장면이다. 정적인 아이슬란드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무척이나 다이나믹한 지역이다.

곳곳에 얼어붙은 웅덩이 같은 게 있지만 수증기와 눈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아차 하는 순간 펄에 발이 빠지면서 신발은 엉망이 됐다. 아이슬란드를 위해 준비한 아이템이었는데 편안한 착화감에 비해 방수 성능은 별로였다. 금세 젖어버려서 깜짝 놀랐다. 젖은 신발을 말린다고 스팀에 올렸다가 너무 바싹 말리는 바람에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든 건 비밀이다.

펄에 빠진 부츠 때문에 불편했던 것도 잠시였다. 이내 귓불을 베는 것 같은 칼바람이 불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할 말을 잊게 만드는 흐베리르의 놀라운 풍광이 펼쳐졌다.

 

지열발전소를 지나는 길에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관문. 파이프를 매설하지 않고 들어 올려서 차가 통과하게끔 했다

 

귀여운 이름의 비티 분화구는 사실 지옥을 의미한다

 

흐베리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티(Viti) 분화구는 크라플라 산정에 있는 칼데라 호수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무척 아름다웠다. 겨울에 간다면 강추하고 싶은 장소다. 눈이 없었다면 아마 저 밑으로도 내려갈 수 있었을 것 같다. 눈이 없을 때 모습은 또 얼마나 멋질까 해서 찾아보았는데 이게 웬걸, 대실망이다. 마치 갈수기에 바짝 말라버린 농업용 저수지 같았다. 비티 분화구는 꼭 겨울에 봐야만 하는 풍경이라 하겠다.

사실 비티(Viti)는 동화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이름 속에 ‘Hell’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헬? 헬이 뭐야 대체. 이런 작명 센스란…’ 하며 자료를 찾아봤더니 글쎄, 새끼 바다표범 눈망울 마냥 아름답던 비티가 눈앞에서 지옥도를 펼쳐 든다. 이 사진을 미리 봤다면 물가를 거니느니 마느니 같은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성싶다.

 

마그마를 끊임 없이 내뱉었던 크라플라산

 

1975년 크라플라산에서 일어난 대폭발은 크고 작은 분출로 이어졌는데, 무려 9년간 지속했다. 그동안 36㎢에 달하는 면적이 마그마에 의해 덮였으니 정말 대단한 규모의 화산활동이었다.

 

 

지구의 온기에 안겨

 

여행으로 노곤해진 몸을 풀어 줄 시간이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스케쥴이었던 미바튼 네이처 배스(Mývatn nature baths)에 도착했다. 뜨끈뜨끈한 노천탕에 몸을 지질 차례다.

 

알싸했던 저 공기가 너무 그립다

 

마침 해 질 녘이 되어 대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꼭 겨울에 가길 바란다. 사실 블루라군을 갈지 미바튼을 갈지 고민이 많았다. 블루라군은 레이캬비크에서 가깝고 아이슬란드에서 규모나 유명세 면에선 으뜸이었다. 하지만 인공적인 요소보다 좀 더 자연에 가까운 형태였던 미바튼 네이처 배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물론 가장 베스트는 두 곳 모두 가보는 것.

 

따뜻한 온천수에 여행자들은 몸도 마음에 녹아내린다

 

사람들은 그간 달려온 2,500km의 링로드 일주에서 쌓인 피로를 녹이며 각자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어디서 왔는지, 오로라는 보았는지… 지구의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데워진 노천수 안에서 여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경계를 허문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양은 꺼지기 직전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대기를 붉게 물들이며 점점 고도를 낮아지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하자 수십,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지구 곳곳에서 이곳에 다다른 사람들은 꼭 무엇에 홀린 것처럼 하나둘 지는 해 앞으로 모여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문명을 벗어던진 인간들이 태양을 숭배하던 태고의 인류로 돌아간 것 같았다.

 

흐베르프잘(Hverfjall) 분화구 위로 떠 오른 보름달

 

 

내 인생의 첫 오로라

 

미바튼 호텔에 도착한 뒤 양고기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숙소인 호텔 미바튼에 도착했다. 추위를 버티다 바닥난 에너지를 보충하는 데는 역시 양고기가 딱이었다. 양고기 특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도 그렇고, 씹을 때마다 적당한 기름기가 배어 나오는 게 더 이상 소고기는 필요 없을 정도다.

호텔 미바튼에서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른바 오로라 콜이다. 야간에 호텔 근무자들이 수시로 하늘을 체크하면서 오로라가 뜨면 방으로 전화해주는 서비스다. 체크인할 때 미리 말해놓으면 새벽이라도 콜을 준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오로라 지수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비스를 신청했다.

 

‘오로라를 정말 조금 보면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라는 일종의 최솟값이라고 여기면 된다. 맨눈으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의 오로라다. 그나마 장노출로 촬영하니 청록빛이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

 

두 시쯤 정도였다. 자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북쪽 하늘에 오로라가 떴단다. 당장 커튼을 열어젖혔다. 하늘에는 별다른 게 없었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일단 옷을 입고 장비를 챙겨서 로비로 나갔다.

오로라가 있었다. 하지만 육안으로는 아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약한 오로라였다. 카메라로 장노출 촬영을 하면 그나마 선명하게 보였지만,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오로라에는 털끝만큼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혹시나 조금 더 기다리면 커지진 않을까 싶어서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렸지만 더는 커지지 않았다. 그래도 오로라를 본 게 어디냐며 위로했다.

짧고 가늘었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을 보여주며 사라져간 나의 첫 오로라였다. 차라리 아예 못 봤다면 미련이라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감질나게 살짝 보여주고 떠나니… 언젠간 제대로 오로라 찍으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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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

박상인

케묵은 니콘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와 방구석에 놓여 있는 더플백을 번갈아 쳐다보며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시대착오자 / goliathus

* 블로그 : sangin1122.tistory.com
박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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