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Valencia)는 부뇰(Buñol)에서 열리는La Tomatina(라 토마티나, 토마토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지나치는 관문쯤으로 생각했다. 부뇰은 토마토 축제 덕분에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뿐인 행사라, 그것도 한때. 그 외에는 정말 평화롭고 아무것도 없는 작은 도시다. 무엇보다 숙박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그나마 시내에는 호텔이 두어 개 있긴 하지만, 일 년 내내 토마티나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철저히 준비한 관광객들에 의해 이미 다 꽉 찬 상태. 발렌시아는 부뇰에서 불과 1시간이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일 뿐만 아니라, 도시 규모도 굉장히 큰 편이다. 우리는 부뇰에서 힘들게 숙박을 해결하느니 차라리 발렌시아에 숙소를 잡고 부뇰에 다녀오기로 했다.
열정적인 토마티나를 마치고 숙소에서 간단히 재정비한 뒤, 발렌시아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우리는 발렌시아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낮았는데, 별다른 특색이 없는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여러 장소를 검색했는데 그나마 가장 눈에 들어오는 곳은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 예술과학공원). 예술과학의 도시는 박물관, 공연장, 아쿠아리움 등의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놓은 일종의 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근처에는 해변과 대형 쇼핑센터가 있다고 해 마요르카로 출발하기 전 필요한 먹거리들을 사기도 좋아보였다.
감동스러웠던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
쇼핑센터를 나와서 예술&과학의 도시로 걸어가는 길.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 기대가 없던 도시에 이렇게 예쁜 장면을 만날 줄이야! 역시 스페인의 도시는 일단 가보고 판단해야 한다. 이른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해 질 무렵이 됐다. 조금씩 물들고 있는 하늘과 어우러지는 예술과학의 도시는 정말 아름다웠다. 건물도 아름다웠지만 건물을 둘러싼 여러 조형물도 인상적이었다. 곳곳에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이곳을 ‘공원’이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우리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걷기 좋은 길이 계속 이어진다. 인공미가 넘치기는 하지만 예쁘긴 예쁘다. 건물 주위로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물 색깔도 매력적이다. 이 연못에서는 보트도 탈 수 있는데,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다. 공원은 크게 예술과 과학으로 나뉘어져 있고, 주제별로 박물관과 공연장이 있다.
메인 산책로 옆으로는 특별한 길도 있다. 곳곳에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인공 연못 근처로도 산책할 수 있고, 오른쪽에 있는 박물관과 조형물 전체를 둘러싸는 산책로도 있다. 많은 사람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과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노을과 함께 하는 낭만 산책!
박물관은 9시까지 오픈하는데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해서 내부 관람은 못 했다. 건물 규모로 짐작건대 안에도 볼거리가 상당히 많을 것 같다. 비록 안을 보지는 못 했지만 밖에서 가만히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가볍게 둘러보고 잠시 앉아 해 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정말 금방 갔다.
스페인에서 살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스페인의 하늘은 다채롭다. 구름 한 점 없이 정말 파랗거나, 구름이 있더라도 누군가 공들여 뿌려놓은 듯하다. 특히 구름 낀 날의 하늘은 더 아름답다. 산책 후 보았던 발렌시아의 하늘이 그랬다.
한참을 하늘만 감상하다 해가 거의 다 졌을 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소를 발렌시아의 중심지로 옮겼다. 토마티나 축제에서 만났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맥주 한 잔을 하기 위해서다. 까르푸에서 내일 아침 식사 거리를 간단하게 사 들고 대성당이 있는 중심지로 이동해 일행을 만났다. 함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즐겼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중심지를 다시 둘러보는데, 발렌시아의 야경도 꽤 볼만했다.
개성 넘치는 웅장한 건물들
다음 날, 마요르카(Mallorca)로 이동하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발렌시아를 다시 둘러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훨씬 예쁘고 매력적인 모습 때문에 그냥 떠나기가 아쉬웠다. 마침 비행기 시간도 여유 있었다. 우리는 발렌시아 역에 들러 짐을 맡기고 중심지로 향했다.
일단 발렌시아는 세비야와 비교했을 때 건물들이 상당히 컸는데,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편일률적인 빌딩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양식으로 다양한 개성을 뽐내고 있어 웅장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세비야 생활 5개월 만에 거의 촌사람이 다 된 우리는, 고층 빌딩만 보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한국에서 우리는 테헤란로와 을지로를 다니며 늘 10층 이상의 건물만 보고 살았는데, 스페인에서는 5층만 넘어도 뭐가 그렇게 커 보이던지…
천천히 시내를 둘러보면서 가볼 만 한 곳을 확인했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발렌시아 역시 대성들을 중심으로 구시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대성당도 좋지만 조금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마침 근처에 큰 시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여기도 전통시장이 위기를 겪는지 온통 닫혀 있었다. 조금 더 둘러보다가 어쩔 수 없이 대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대성당. 발렌시아 대성당도 규모가 꽤 컸다. 세비야 대성당과는 겉모습이 약간 다른 분위기다. 아마 건축된 시대가 달라서 양식도 조금 다른 거로 추측해본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역시나 대성당은 아름다웠다. 사실 세비야 대성당이 워낙 크다 보니, 웬만한 도시에 가서 대성당을 보고 놀라는 일이 별로 없다.
대성당을 벗어나 옆에 있는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여유를 즐기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는 투어프로그램에 참여 중이고, 누군가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축구공으로 묘기를 부렸다. 잠시 들른 광장이었지만 사람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광장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마요르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저 토마티나를 위한 관문으로 생각했던 발렌시아는, 생각보다 훨씬 예뻤고 나름 다양한 볼거리도 있었다. 마치 다른 나라에 간 것 같았다. 발렌시아 여행을 하면서, 스페인의 어느 도시든 방문하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스페인은 정말 도시별로 저만의 매력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