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샘솟는 땅 – 아이슬란드 겨울여행 #6

(5편에 이어서)

 

 

이곳에 서면 마치 산맥처럼 거대한 해일이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운전 중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해일과 같은 지형. 아, 이거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인데… 아! 바로 인터스텔라의 그 장면이다. 갑자기 지도에 없는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 바다가 아니라 호수인가, 강인가? 대체 뭐지? 입이 떡하니 벌어졌던, 그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추측하건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도 그 장면의 영감을 이곳에서 얻었으리라.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포인트였지만, 아이슬란드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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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데티포스(Dettifoss)를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배가 고파진 우리는 주린 배를 채우고자 휴게소에 들렸는데, 여전히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우리가 고른 로컬 햄버거는 육즙이 가득했고 맛도 풍부했다. 맛 좋은 햄버거를 먹으며 링로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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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보면 벙커처럼 생긴 조그마한 집 같은 것들이 보이는데, 추운 겨울 동안 양과 같은 가축들이 머물 수 있게 지은 마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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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로 들어서니 도로 사정이 좀 나아졌다. 따듯한 햇볕이 다시 길을 비추었고 도로 위로는 사륜구동 차량뿐만 아니라 가끔 구형 세단 차량도 보였다. 아이슬란드 북쪽으로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우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슬란드 날씨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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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을 방목하기 위해 지어진 울타리와 출입문. 그리고 누군가의 손글씨

 

 

한참 동안 평지를 달리다가 다시 눈길에 들어섰다.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고지대로 들어선 우리는 오래간만에 나타난 뷰포인트 표지를 보고 바로 차를 세웠다.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온통 눈밖에 보이지 않아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주변에서 표지판 하나를 더 발견했다. 이 구간은 사륜구동 차량만 통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아이슬란드의 고지대 중 일부 지역은 눈이 녹는 여름에도 사륜구동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다. 겨울에는 이마저도 통행이 금지된다. 다행히 우리가 있던 곳은 링로드 지역으로, 폭설이 내리면 제설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지는 구간이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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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1번 도로다. 아이슬란드의 상징과도 같은 노란 표지판 위에서 동생을 한 컷

 

 

문제는 영하의 온도 덕분에 길이 언제나 꽁꽁 얼어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력상으론 10월 말이라도 아이슬란드 링로드 일주를 하기 위해서는 스노우타이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이 부분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빗길에 얼어버린 도로에서는 이마저도 부족한 감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 여행기에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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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이어진 2차선의 작은 도로, 길의 경계를 표시하는 노란색 바는 폭설이 와도 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길게 솟아있다

 

다시 도로는 안개에 휩싸였다. 우리가 아이슬란드를 떠난 뒤 ‘꽃청춘’ 팀이 방문했을 때는 눈 폭풍이 몰려오면서 눈보라의 규모와 세기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저 멀리 환영과 같은 설산이 나타났다.

 

 

부지런히 달렸는데도 데티포스에는 오후 네 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지형이 심상치 않은 게 ‘올게 왔구나’ 싶었다. 드디어 프로메테우스의 그곳을 보게 되는 건가,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뛰었다.

그런데, 이거 왠지 영 위험해 보인다. 폭포에서 튀긴 물보라가 길 위에서 전부 얼어붙어 완전 미끄러운 상태인데도 안전 바 같은 건 전혀 없다. 고작 ‘화단에 들어가지 마시오’ 정도의 밧줄 펜스가 전부였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니 행동거지가 되려 조심스러워지기는 한다.

 

 

드디어 저 멀리서 눈에 들어온 데티포스. 사실 프로메테우스의 오프닝 장면에서 등장했던 곳은 지금 있는 곳의 건너편이다. 원래는 건너편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폭포의 흐름을 잘못 읽고 말았다. 우리는 지도의 강이 당연히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물의 흐름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었다. 상류와 하류를 착각한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건너편에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길이 막혔거나 접근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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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티포스의 관람 포인트를 보여주는 지도와 관광안내판. 물이 흐르는 방향은 아래에서 위인데, 우리는 당연하게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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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클릭하면 큰 사이즈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데티포스가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지 알 수 있는 사진이다. 물보라가 어찌나 심한지 저 아래까지는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사진에 보이는 저 사람들은 분명 러시아 같은 동슬라브족 관광객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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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 형태로 쪼개진 바위들. 저 가운데쯤에 들어가서 팔다리를 쭉 뻗고 에네르기파를 맞은 베지터나, 벽에 처박힌 아이언맨 따위를 흉내 냈었어야 했는데, 좋은 생각(?)은 언제나 나중에 떠오른다

 

데티포스에서 나와서 아스비르기 협곡(Ásbyrgi)에 가보려고 차에 올랐다. 아스비르기 협곡은 아이슬란드 여행 카페의 어느 회원이 ‘그동안 수많은 여행지를 다녔는데, 눈물을 흘린 몇 안 되는 명소 중 하나’로 극찬한 곳이었다. 가는 중간에 오프로드 코스가 있음에도, 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보통 협곡 아래를 트레킹하는 코스로 잘 알려졌지만, 우리는 협곡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루트를 미리 알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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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로의 표지판을 보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도로 위에는 별도의 통제표시가 없었지만, 길 위에 앞서 지나갔던 차량의 타이어 자국이 있어 그걸 보고 따라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도로 위에 남았던 타이어 자국은 사실 오래전에 찍힌 것으로, 그 위에 눈이 쌓이면서 언뜻 보면 얼마 전에 생긴, 얕은 자국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것만 보고 도로가 바로 아래에 있는 줄 알고 달려간 거였는데, 그곳은 30cm 이상의 깊이로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이었다. 차체는 눈 위에 붕 뜬 꼴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우리는 일단 내려서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가 눈에 둘러싸이면서 문까지 열리지 않았다.

아래는 눈을 파내면서 떠오른 생각 중 일부,

 

‘어째 순조롭다 했더니 호되게 당하는구나.’
‘올 것이 왔다.’
‘이걸로 여행 스케줄은 끝이 나고 말 거야.’
‘무지막지하다는 견인비용은 얼마나 되려나?’
‘남들 다 경험하는 조난이라더니, 내게도 드디어…’
‘견인차가 도시에서 출발하면 2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한 시간 후면 해가 지면서 기온도 떨어진다.’
‘만약 이 상태로 폭설이 내린다면?’

 

차 문을 막고 있던 눈을 맨손으로 치우고 겨우 차에서 빠져나온 우리 가족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차 옆에 달라붙어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차를 다시 움직이려면 차를 받치고 있는 눈을 치우는 게 급선무였다. 삼각대를 시작으로 온갖 도구를 사용했다. 간신히 바퀴 주변과 범퍼를 둘러싼 눈을 치울 수 있었다. 그다음엔 아버지께 운전대를 맡겼고,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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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도로 위에 안착한 차를 향해 되돌아가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

 

긴장과 불안감 속에 몇 번의 공회전과 헛바퀴 돌기를 반복되면서 조금씩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다시 후진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떼며 휠 스핀이 날 듯 말듯 조절하시다가, 이때다 싶으셨는지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으셨고, 차는 후진하며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차는 안전한 곳까지 이동한 뒤 정지했다. 우리는 환호성을 차량을 향해 지르며 달려갔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지만 차가 멈춘 뒤로 다시 도로 위에 올라갈 때까지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걸 보면 당시에 우리가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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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수렁에서 빠져나온 차. 휠 안쪽까지 가득 찬 눈을 보면 지금도 한숨이 나온다. 저 멀리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빛의 하늘은 마치 심연의 공포처럼 느껴졌다

 

 

눈 소동에 지쳐 조용히 후사비크(Húsavík)를 향해 달려가던 중에,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잠시 차에서 내렸다. 미바튼(Myvatn) 지역을 소개하는 안내판이었다. 뮈바튼은 활발한 지각활동으로 인해 곳곳에서 유황가스와 뜨거운 용천수가 분출되는 지역으로 블루라군(Blue Lagoon), 네이처 배스(Nature Bath) 같은 노천 온천이 유명하다. 미바튼은 후사비크 다음으로 들를 예정이라 우리는 다시 길을 달렸다.

 

 

밤이 다 돼서 도착한 후사비크의 ‘게스트 하우스 아르볼'(Guest house Arbol). 넓진 않지만 깔끔하고 지역색이 잘 드러나는 따듯한 곳이었다. 특히 주인아저씨의 턱수염과 시원시원한 성격이 친절함을 더했다.

운전과 제설로 지쳐버린 심신을 채우고자 바로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라서 항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목이 좋은 곳에 있는 만큼 가격은 상당했지만, 이 식사는 눈밭에서 탈출을 기념하는 자리였던 만큼 모두 말없이 승인했다. 후사비크는 아이슬란드 근해의 품질 좋은 대구가 잡히는 항구도시이므로, 우리는 대구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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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로 두툼한 살을 쪼개 입에 넣는데 아, 이 쫀쫀한 식감이란… 감동적이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냉동 대구스테이크나 생선가스랑은 정말 비교가 불가한, 진정 어마어마한 맛과 식감이었다. 사실 연어를 좋아해서 연어를 시킬까도 고민했는데, 후사비크에 가는 여행객이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건 꼭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마디로 ‘아이슬란드=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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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보시고 웃으셨던 명패. 후사비크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이유다

 

여행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밤이었지만, 후사비크의 아침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대도 됐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차의 시동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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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

박상인

케묵은 니콘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와 방구석에 놓여 있는 더플백을 번갈아 쳐다보며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시대착오자 / goliathus

* 블로그 : sangin1122.tistory.com
박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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