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난 지도 이제 19일째. 태국을 거쳐 미얀마로 왔다. 계획했던 3주간의 일정 중 일주일 정도를 남겨둔 상태. 미얀마는 5년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변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잘 웃고 착한 심성을 가졌다. 늘 고마운 사람들이다. 다시 오겠다는 확신은 절대 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건 분명하다. 도시는 먼지투성이고 산간은 황폐했지만 마음속은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미얀마. 늘 내 머릿속 한쪽에 남아 있을 것이다.
쉽게 누를 수 없었던 셔터, 양곤(Yangon)
5년 전 양곤은 자동차 배기가스가 너무 심했다. 양곤에서 머물다가 기관지염을 앓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의 양곤은 그때와 비교해 차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대기상태는 오히려 나아진 편이었다. 목의 통증도 조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거리를 질주하던 50년대 생 버스들이 많이 사라졌다. 뚜껑만 달고 달리던 택시도 자취를 감췄다. 가끔 옛 버스들이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에서 팔려온 옛 버스들이 옛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양곤 시내를 질주한다.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얀마 사람들의 심성이 고맙기도 하다.
양곤에는 ‘양곤 순환 열차(Yangon Circular Train)’라는 기차 여행 상품이 있다. 양곤 외곽을 열차를 타고 한 바퀴 도는 코슨데, 시간은 세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요금은 우리 돈으로 200원. 여러 번 확인했지만 정말 200원이었다. 양곤과 미얀마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용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외곽에 있는 주민들의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참담하기까지 한 그들의 삶을 계속 보는 일은 여행자로서 참 힘들었다. 차라리 먼지와 악취는 참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넘치는 삶에도 불구하고 왜 더 가지려 악을 쓰는 걸까… 나에게 세 시간 반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기차를 타기 전, 망원렌즈를 장착하고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을 찍어보겠다 욕심을 냈지만, 쉽게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고작 다섯 컷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숙소에 돌아와 모두 삭제했다.
기차는 최고속도가 시속 40km를 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앞으로 달리는 데도 양옆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었다. 양곤 역에 돌아와 기차에서 내릴 때 차가 그렇게 심하게 흔들렸던 이유를 알았다. 선로가 뱀처럼 휘어 있거나 아예 구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철도를 놓은 이후에는 보수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모양새다. 반백 년 전에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준 기차라는데…
간절한 소망을 쌓아 올린 땅, 바간(Bagan)
간절한 소망으로 쌓아 올린 탑들을 보면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크게 감동하게 된다. 이름도 외우기 힘든 탑들이지만 탑을 세운 이들의 지극한 정성과 건축적 예술성은 감동적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2천여 개의 크고 작은 탑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구석구석 관광객만 북적이고 넘쳐난다. 바간의 길 위에는 쌩생 거리며 달리는 오토바이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는 마차가 함께 달린다.
5년여 만에 다시 만난 마부 녀석. 나를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벌써 26살이 됐단다.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싶었는데, 나에게 젊은 아가씨를 소개해줄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OH MY GOD! 바간이 어떻게 변해 가는 거지? 아무튼 이 녀석을 만났으니 나로서는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룬 셈이다. 좋다 바간.
스님 나 약속 지켰습니다, 만달레이(Mandalay)
좁은 이차선도로 이긴 했지만 비포장도로였던 과거에 비하면 대단한 일이다. 덕분에 편하게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만달레이 날씨는 바간에 비하면 폭염에 가까웠다.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 오는 트럭을 개조한 버스는 먼지로 인해 숨쉬기는 물론 눈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담하고 시원한 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 키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해 슬리퍼를 끌고 구멍가게를 찾았다. ‘치익’ 얼음 같은 캔 맥주 뚜껑을 여는 명쾌한 소리. 목구멍으로 콸콸 들이붓다시피 마셨다. 이 짜릿한 상쾌함이란.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건 해 질 녘이었다. 모처럼 만의 단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사가잉 언덕(Sagaing Hill)이다. 만달레이 시내에서 멀지 않은 외곽이지만 내가 탄 버스는 승객이 얼마 간 차야 움직이는 시내버스였기 때문에 사가잉에는 한 시간 반 후에야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버스비도 몇 배나 바가지를 썼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찾아 간 곳은 5년 전 만났던 동자승들이 머물던 수도원이다. 20대 스님에게 옛날 사진을 보여주니 사진 속 스님을 지목하더니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다른 동자승 몇몇은 아직 있는데 외출해서 언제 올지는 모른단다. 아쉽기는 했지만 동자승이나마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수도원 둘레를 돌았다. 사방이 탁 트인 사가잉의 전경을 감상하며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지만 동자승들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젊은 스님마저 휑하고 가버리니 수도원에 있는 건 나뿐이다.
이런 게 적막감일까? 해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석양을 만들었다. 이제는 하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시간이 흘러 서산의 해가 더욱 붉게 물들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배낭을 멨다. 터벅터벅 걸어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정말 속이 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머릿속에선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애써 잊으려 해도 너무 아쉽다. 그 먼 길을 찾아갔는데 못 보고 간다니… 그래. 이럴 땐 맥주나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