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흔적을 더듬어 가는 길 – 해방촌 탐방기 #1

강남과 강북 그리고 해방촌

 

강남 출생은 아니지만, 지난 20여 년을 강남 모처에서 자라왔던 나에게 강북은 몇 가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지역색이다. 아마도 서울에서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소위 ‘강남’,  ‘강북’으로 비교되는 패션 말이다. 사춘기의 우리에게 패션은 가장 큰 화두였다. 강남의 패션 코드는 통 큰 바지로 대표되는 힙합이었고, 강북은 요즘 패션 코드와 유사한 스키니였다.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패션 사이에서 우월감을 갖는 쪽은 단연 강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남은 이른바 ‘성공’의 대명사였다. 풍족한 자본을 바탕으로 당시 대한민국의 최신 트렌드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곳에 소속됐다는 자신감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사실 역사적으로 살폈을 때 우월감을 드러내야 할 곳은 강북이다. 지금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강남이지만, 과거에는 누에를 치고 논과 밭으로 가득했던 곳이 강남이었다. 심지어 강남은 1963년에야 서울로 편입됐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것은 70년대. 즉, 강남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50여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논밭에 불과했던 신생 도시인 강남에 비한다면 강북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도읍이 이전된 이후,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와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심에 있었던 지역이다. 수년 전 화재로 소실 된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본래 의미를 생각한다면 중심지라는 이야기가 쉽게 이해된다. 도성의 경계를 구분 지었던 것이 각 대문의 역할이자 용도였다. 도성은 정보와 자본, 권력이  집중된 곳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역사의 중심이었다. 강북의 여러 도시에서 느껴지는 향수는 그곳에 누적된 오랜 역사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강남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단층 주택은 빌라가 되었다가 아파트로 변했고, 동네 작은 슈퍼마켓은 어느 순간 빌딩이 됐다. 불과 십수 년 만이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과거의 흔적이 거의 다 사라지기도 했다. 강북이라고 해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강남보다 속도가 더딜 뿐,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나는 더 많은 것이 변하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해방촌은 강북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긴 역사를 가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일제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우리민족의 가장 큰 아픔인 6.25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이다. 한 매체에서 해방촌에 얽힌 이야기를 접한 뒤로 알 수 없는 애틋함이 생겼다. 내가 해방촌을 찾은 이유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시작된 마을에서 유래했다. 6.25 전쟁 이후에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해방촌에는 이북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식민지 해방과 남북 분단 속에서 생겨난 해방촌은 굴곡진 우리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후 산업화가 도래하면서 전국에서 이주민이 몰려오기도 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던 월남인과 살길을 찾아 몰려든 이주민들이 어우러진 해방촌의 풍경은 빽빽하게 들어선 판잣집들로 대표됐다.

 

 

쉬엄쉬엄 해방촌 언덕을 오르며

 

녹사평역 2번 출구로 나오면 해방촌으로 갈 수 있다. 해방촌의 정식 행정구역명은 ‘용산동2가’이지만 ‘해방촌’이라는 표기가 더 많이 보인다

 

해방촌은 지하철을 이용해 갈 수 있다. 5호선 녹사평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해방촌으로 이어진다. 출구로 나오면 왼쪽에 높은 담장이 보인다. 이 옆은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해방촌으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선다. 해방촌까지 가는 방법은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방법과 건너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해방촌 오거리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해방 이후 해방촌 지역은 용산동회에서 담당해 ‘용산동회’로 불렀다. 점차 해방촌의 규모와 입지가 커지면서 ‘해방동회’가 신설되었고, 해방동회는 다시 해방동과 신흥동으로 구분된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었지만 신흥동으로 나뉘기 전에는 동부동과 서부동으로 나뉘어 불리기도 했는데, 그만큼 이 지역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동과 신흥동은 용산동2가 1동과 2동으로 바뀌었다가, 1977년에 현재의 용산동2가로 통폐합됐다.

 

대로 옆으로 작은 길이 나온다. 해방촌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이다

 

미군 부대 담벼락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대로 옆으로 작은 길이 하나 더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해방촌 오거리로 이어진다. 남산자락에 있는 동네이다 보니 어느 곳에 있더라도 이정표처럼 우뚝 솟아있는 남산타워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촌 오거리까지는 걸어서 15~20분 정도 걸린다.

 

작은 골목길에는 이국적인 매력을 뽐내는 매장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해방촌의 명소가 되고 있다

 

해방촌 오거리까지 가는 길에는 예쁘게 꾸며진 카페나 햄버거 가게 등을 비롯해 필리핀 수입 제품 마트, 모스크  등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해방촌은 이태원과 인접해 있어 주택가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색이 동네에 묻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추위를 달래고자 잠깐 들어갔던 카페에서는 온갖 벽에 붙은 영어 모임 홍보 문구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골목골목 빽빽하게 들어선 연립주택들. 지금의 해방촌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 지역 어르신들에겐 유일한 놀이방이었을 것 같다

 

해방촌 오거리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조금 가파른 언덕길이 계속 이어진다. 쉬엄쉬엄 가지 않는다면 숨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걷는 동안 2~3층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주택가가 주로 보이는데, 가끔 그 사이로 정겨운 장면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청계천 어디에서 볼법한 기원이었다. 온통 주택가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마땅한 편의시설이나 오락시설이 없었다. 아마도 ‘편안한 휴식공간’이라는 글자처럼 오랜 시간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해방촌의 중심에서 오랜 흔적을 더듬어 가는 길

 

해방촌 오거리의 모습

 

해방촌은 남산타워와 인접해 있을 만큼 높은 곳에 있다. 오거리부터 이어지는 소월길에선 서울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방촌 오거리는 말 그대로 다섯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이다. 언덕길 끝, 산의 정상처럼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오거리 주변으로 경찰서와 편의점, 시장통이 보인다. 만약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이동했다면, 해방촌의 중심지에 도착했다고 봐도 된다. 사진에서 보이는 정면으로는 해방촌 교회와 신흥시장, 보성여고가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후암동으로 이어진다. 경찰서 위로 나 있는 길(소월길)을 따라가면 해방촌을 발아래에 두고 후암동과 서울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해방촌을 어루만졌던 해방교회

 

초기 해방촌의 주요 구성원은 이북 사람들,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었다고 한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듯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동향에 대한 애착과 유대감이었다. 해방촌의 월남인들 사이에서의 결속은 유별났다. 그래서 해방촌의 어떤 지역에선 선천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선천군민회가 조직되면서 지역 주민들은 더욱 단단히 뭉쳤다.

하지만 해방촌의 구성원에 변화가 생겼다. 산업화 과정에서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민들이 몰려들었고, 살림살이가 나아진 월남인들의 상당수가 스스로 해방촌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지연으로 똘똘 뭉쳤던 공동체의 결속력에도 변화가 생겼다. 월남인들에게 해방촌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두 번째 고향이었지만, 가난과 배고픔으로 가득했던 어려운 시절의 해방촌은 잊어야만 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특정 지역으로 뭉친 구성원과 더불어 해방촌의 구심점이 됐던 것은 종교였다. 사진에 보이는 해방교회는 해방촌 내 많은 교회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초기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 신자들은 남대문교회와 을지로에 있던 베다니교회(영락교회 전신)에 다녔다. 이후 해방촌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해방촌교회’를 시작했을 때 남대문교회에서 교역자를 파견하면서 정식교회로 출발하게 됐다.

전쟁 직후 해방촌은 정치적인 이유로 서글픈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일부 단체나 개인들에게 제한적으로 지원했던 경우는 있었지만 해방촌 주민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소외됐던 해방촌을 어루만졌던 곳이 해방교회였다. 교회는 해방촌 사람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교육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베풀고 나누는 따뜻한 손이 되었다. 해방교회는 단순한 종교시설 이상의 의미였다.

해방교회는 고만고만한 주택들로 밀집한 해방촌에서 아마도 가장 큰 건물이 아닐까 싶다. 예배당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힘들었던 그때 유일한 안식과 위로였을 교회를 떠올리니 새삼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옆으로는 해방 어린이집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을 나서는 아이 뒤로 남아 있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보성인..”

 

해방교회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성 여자고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방학 기간이라 교문은 닫혀있었다. 벽에 적혀있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보성인..’.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이 구절은, 학교목표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서 나라와 겨레에 헌신 봉사하는 참된 한국 여성을 육성한다”. 신앙인은 자신의 구도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향해 있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역할이자 사명이다.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학교들은 대부분 북한지역에서 시작됐다. 일제 탄압과 전쟁 등으로 일부 학교는 남한에서 다시 세워지기도 했는데, 보성여중, 고등학교를 비롯한 숭실 중,고등학교가 재설립된 사례다. 미국 선교사에 의해 평양의 사랑방 학교로 시작된 숭실 중,고등학교는 1938년 평양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숭의, 숭전과 함께 폐교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다가 한국 전쟁 중 피난학교를 열게 됐고, 전쟁 후에는 미군의 도움으로 해방촌에서 자리를 잡아 정식 학교로 설립됐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숭실학교의 위치인데, 그곳은 과거 일본신사가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고 한다. 식민시절 남산 일대에는 조선신궁 같은 각종 신사가 세워졌다. ‘민족말살정책’을 목적으로 서울의 중심에서 조선을 내려다보며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런 신사 위로 일제에 의해 폐교됐던 학교가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후 숭실 중,고교는 마포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보성 여자중,고등학교는 숭실학교와 마찬가지로 미국 선교사에 의해 평북 선천에 설립된 보성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부산 피난학교 시절을 거쳐, 1955년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의 남산타워는 2005년에 새롭게 리모델링 됐다

 

날씨만 흐리지 않다면 제주 전역에서 그 중심에 있는 한라산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방촌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고개를 들기만 하면 제주도의 한라산처럼 남산타워가 보인다. 언덕길을 오를 때만 해도 꽤 멀리 있어 보였지만, 해방촌 오거리에서 바라본 남산타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남산타워는 연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이자, 인바운드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코스이기도 하다. 서울 전역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고, 시야가 맑다면 송악산이나 인천항까지 볼 수 있기에 남산타워를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판잣집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풍경은 더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이다. 하지만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해방교회를 지나 한 쪽에 자리 잡은 ‘해방촌 주차장’

 

작업을 마치고 남은 천 쪼가리들이 비닐봉지에 수북하게 담겨있다. 편물업은 아직도 해방촌의 주요 소득원이다

 

초기 해방촌을 먹여 살린 것은 ‘사제 연초제조업’, 즉 ‘담배’였다. 담배를 만드는 데에는 복잡한 기술이나 도구가 필요치 않았다. 적은 인력으로도 가내 수공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진 것 없던 해방촌 사람들에게 적합한 아이템이었다. 해방촌에서 만들어진 담배들은 주로 남대문 시장 등에서 팔렸다. 5.16쿠데타 이후 정부가 담배 제조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촌은 ‘스웨터’와 같은 편물업으로 업종을 전환하는데, 이때부터 온통 판잣집만 있던 해방촌에 기와집과 양옥집이 들어오게 된다. 여전히 편물업은 해방촌의 주요 소득원이지만 점차 쇠퇴하고 있다.

 

해방촌 고양이

 

보성여고를 둘러보다 어디선가 들린 ‘갸르릉’ 소리.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에겐 친숙했던 소리였다. 나는 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리 저리 찾다가 눈앞의 담 너머로 까치발을 들어 살펴보니, 끄트머리가 보일만 한 지붕과 지붕 사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갸르릉 거리고 있었다. 탐방을 갔던 날은 해가 정오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제법 훈훈한 날씨였다. 고양이는 아마 볕을 쬐려는 참이었는데, 저벅저벅 골목길을 걸어오던 내 걸음 소리가 꽤 거슬렸나 보다. 한동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카메라와 대치했다.

해방촌은 종종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곤 했다. 소설 ‘해방촌 가는 길’을 비롯해 초기 한국 영화의 명작 중 하나인 영화 ‘오발탄’의 무대가 해방촌이었다. 최근 작품으로는 수필집 ‘해방촌 고양이’가 있다. 나도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하는 –고양이털 알레르기로 인해 제대로 키워본 적 없는-애묘인이지만, 이 책의 저자인 황인숙 작가는 해방촌 골목길을 떠돌며 5년 동안 30여 마리 길고양이들의 사료를 챙겨줬다니 여간내기가 아닌 듯하다. 골목길을 숨어다니는 고양이들을 돌보는 손길이 실향의 외로움과 가난과 배고픔의 서러움을 달랬던 누군가의 손길과 닮아 보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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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자의 운영자. 얼마 전 육아의 늪에 빠져든 이후 당분간 여행은 포기했다. 해묵은 여행 사진을 뒤적이거나 남의 여행기를 탐하고 있다. 기고는 언제나 대환영! contents@travelwri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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