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여서도 생존기
둘째 날이 밝았다. 본격적으로 섬을 조사해보기 위해 등산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마을 어귀에 이정표가 깔끔하게 박혀있는 게 이번 산행은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했다. 무인등대 옆을 통해 섬의 서쪽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여서항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작은 섬임에도 배가 닿는 선착장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상당히 넓었다.
길은 점점 좁아졌다. 왠지 방목지로 향하는 길이 나올 것 같았다. 이어서 초라한 철사문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고생길이 열릴 것을 직감했어야 했는데…
30분 정도 거친 수풀을 헤치고 갔을 때였을까, 뒤에서 오던 일행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풀잎 끝에 매달려 주린 배를 움켜잡고 숙주를 기다리던 진드기떼가 바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슬쩍 보아도 한쪽 다리에만 20마리 정도였다. 소 방목지인 데다 우거진 풀숲 덕에 진드기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제야 어렴풋이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산? 진드기 때문에 못 올라갈 낀데.’
살인 진드기가 유행할 때라 일단 다시 마을로 내려가기로 하고 하산했다. 그리고는 다시 섬의 동쪽 방향 방목지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산길이 가파르고 인적도 드물어 고작 10m를 전진하기도 수월치 않았다. 특히나 풀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바위는 습하기까지 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허리까지 올라온 수풀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잡풀들이 자라있다. 나중에 마을 어르신께 안 사실이지만, 원래는 등산로 제초 작업을 하는데 최근 4개월 동안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길 찾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쪽 방목지 입구 아래의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서 숨을 좀 고른다.
또 벌에 쏘였다. 섬 전체적으로 쌍살벌류가 퍼져서 살고 있어 이번 여행에서만 4번 정도 쏘였다. 벌집 역시 수풀이 많은 돌담 등에 가려져 있어서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다 쏘이는 경우가 많다. 진짜 대책 없이 당하고 말았다. 쌍살벌한테 쏘이기는 처음이었는데, 정말 전광석화처럼 날아와서 침을 쏘고 내뺀다. 맨 처음에는 볼에 쏘였는데 처음엔 무언가 전속력으로 날아와 부딪힌 줄 알았다. 사라진 방향을 보니 나뭇잎 밑에서 구름처럼 벌떼가 이륙하고 있더라. 그 넘어지기 쉬운 바위 내리막을 초인처럼 쏜살같이 뛰어서 내려왔다. 분명 넘어졌으면 다리가 정말 부러졌을 거다.
산의 반의반도 못 올랐는데 길이 또다시 없어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하산 길에 올랐다. 이거 뭐 길이 보여야 가지…
정겨운 마을로 다시 입성, 제주도처럼 이곳저곳 돌이 쌓여 미로 같은 담을 이룬다. 마을 중간에 샘이 흐르는데 물이 아주 깨끗하다. 가재도 있고, 재미있는 생물들이 많이 산다. 야간에는 대형 닷거미류인 화살농발거미도 많이 발견되었다. 취수정도 하나 있다. 그 자리에서 물을 떠먹기도 하고 받아가기도 하는데 다른 낚시꾼 아저씨가 이곳에서 살모사를 발견했다고 한다. 벌도, 뱀도 많은 여서도. 여기는 대체…
다시 찾아온 밤, 여름인데도 바람이 차다. 맥주 한 캔 들고 야경이나 좀 찍어볼 요양으로 터벅터벅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본다.
이틀 만에 도착한 방목지
마지막 날, 방목지의 위치를 민박집 주인아저씨에게 확인했다. 서쪽 노루목 근처에 있을 거라 하신다. 아. 진드기가 달라붙던 그곳이구나.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생을 다하겠구나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스킨헤드가 돌아다니던 러시아에서 조차도… 그런데 이곳은 진드기든 발아래 독사든 아니면 낙상이든 간에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드디어 방목지에 도착했다. 아 저 소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섬에 사는 소들은 하나같이 근육질이다. 주인아저씨가 소들이 살이 안 쪄서 걱정이란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야 비싼 값에 팔릴 텐데 이놈들은 매일같이 등산을 하니… 이곳에서 또 다른 길이 이어져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현재 방목되는 소가 채 10두가 안 된다고 한다. 지금은 다수 번식하고 있는 이 친구들도 언젠가 서식지가 사라질 걱정에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먹고 사는 일이 곤충이나 사람이나 비슷하구나…
다시 바다가 보인다. 길은 보이는 것처럼 듬성듬성 보이다 만다. 아, 저쪽은 다신 가고 싶지 않은 곳… 좀 너른 벌판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소가 다닌 길목이다. 저 멀리 홋개바위가 보인다. 배를 타고 가면 정말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을. 숨 좀 돌리면서 주변 풍경을 살펴본다. 푹푹 찌는 더위에 날도 흐린데 어선 한 척이 시원하게 바닷길을 가르며 지나간다.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이곳은 벼농사를 짓던 섬 특유의 다랭이논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일할 사람이 없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아 형태만 남아 있다. 원형이 보존되고 있었다면 무척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텐데… 사라져 가는 게 아쉬우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된다. 하산길에는 소를 치는 마을 어르신을 따라 쾌속으로 내려왔다.
임무를 완수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져 슬슬 마을 탐사에 나섰다. 마을을 미로처럼 둘러싸고 있는 정겨운 돌담길, 의도치 않은 조화와 시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마을 곳곳에 소소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찾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 같았다.
커다란 팽나무 옆에 취수정이 하나 더 있다. 저 돌계단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드디어 폐교가 된 초등학교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