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2 – 오키나와, 이에섬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이에섬의 일몰. 멋진 순간이었다. 적어도 이 사진을 찍을때 까지는…

 

숙소에 짐을 푼 뒤 이에섬을 둘러보기 위해 바로 나왔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만큼 해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동네를 구경해야 했다.

예전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섬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대부분 저녁이면 바깥 일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 동행자가 있었으면 같이 뭐라도 했겠지만, 홀로 떠난 여행에서는 가져간 책이나 넷북 따위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음날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가이드북을 펴보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다. 게다가 여행 일수가 더해지면서 현지 감각이 익숙해질수록, 가이드북의 효용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오키나와 여행 내내 저녁에는 다소 심심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날 오후가 되면 이에섬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루에 4번 운행하는 페리 시간을 맞추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목적지로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스케쥴까지 염두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둘러봐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키나와 여행은 차량 렌트를 추천한다.

 

집 앞에 설치 돼 있는 시샤들

 

사진에 보이는 조형물은 시샤(シーサー)라고 하며 오키나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해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의미도 비슷하다. 집 안으로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액막이라고 한다. 쌍으로 이뤄진 시샤는 입을 벌린 것을 수컷, 다문 것이 암컷으로 구분한다. 시샤는 보통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쪽에 위치한 기둥(?) 위에 올라가 있지만, 마당이 없는 경우 문 앞 바닥에 놓기도 한다. 캐릭터의 나라답게, 특산물인 고야와 함께 오키나와 마스코트로서 열쇠고리를 비롯한 각종 기념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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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피어있던 히비스커스. 섬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궁화를 닮은 이 꽃은 ‘히비스커스’다.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데, 이에섬에는 히비스커스 공원이 있어 다양한 품종의 히비스커스를 만날 수 있다. (#3에서 소개한다) 이에섬만의 특별한 꽃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에섬은 히비스커스 보다 백합으로 더 유명하다. 특히 4~5월이면  축제(마쯔리)가 열리는데, 이때 ‘백합 필드 공원’에서는 100만 송이에 달하는 백합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1) 어딘가 익숙한 풍경의 이발소는 한눈에도 오래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일본만의 정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2) 이에섬에는 2층 또는 단층의 집들이 대부분이다.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3) 길을 다니다보면 염소 친구들도 만날 수 있다. 우리네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다
4) 분위기가 멋스러웠던 카페. 다음날 본격 탐방 때 들러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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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피아노 학원 간판. 이 작은 섬에 웬 피아노 학원이?

 

피아노 학원이다. 분위기를 봤을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다. 이 학원을 보면서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이에섬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섬 중의 섬일텐데, 과연 이런 섬에도 아이들이 있을까?  ‘밥은 먹고 살려나’ 괜한 오지랖도 부려본다. 하지만 잠시후 만난 이에 초등학교를 보면서 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이에섬에는 이에 초등학교를 비롯해 니시 초등학교, 이에 중학교까지 3개의 학교가 있다. 학생들이 부족해 폐교되는 사례가 대부분인 우리네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이곳의 아이들은 적어도 중학생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이 섬과 바다를 보금자리 삼아 성장한다. 이에섬을 떠난 이후의 삶이 무엇이 됐건, 자연과 벗하며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이에섬의 상징인 닷츄

이에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닷츄

 

이에섬의 상징인 닷츄(タッチュ, 城山)가 보인다. 닷츄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봉우리’라는 뜻으로, 섬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에 솟아 올라있다. 이에섬은 전체적으로 넓고 평평하게 퍼져 있는데, 솟아오른 닷츄 때문에 멀리서 본다면 챙이 넓은 모자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오키나와의 필수 방문지인 츄라우미 수족관에서는 이러한 이에섬을 볼 수 있다. 닷츄는 172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에섬에서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일반적인 민간신앙에서 그렇듯 영산(靈山)으로 여겨진다. 시간이 늦어 닷츄를 비롯한 이에섬의 본격적인 탐방은 다음날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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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라멘’이란 글씨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 라멘 만큼 흔한 음식이 또 있을까 싶다. 어딜가나 볼 수 있는 라멘집인데, 오키나와에서는 도통 찾기가 어렵다. 전통적으로 소바(そば)가 강세이기 때문이다. 사실 소바는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의 궁정요리로 서민들은 쉽게 접하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소바는 메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 면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물은 가다랭이포와 돼지뼈를 사용해 만들며, 가게마다 특별한 비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라멘과 비교 했을 때 굵은 면과 말간 국물, 담백함 등이 차이점이긴 했지만 비슷한 구석도 많다. 개인적으로 라멘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바 역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닷츄를 바라보며 길을 걷다 만난 이에 초등학교. 알록달록한 벽화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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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초등학교 정문

 

이에 초등학교 정문. 청소년들로 보이는 이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고, 그 사이로 어린 녀석들도 뛰놀고 있었다. 아마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이에섬 역시 우리네 시골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닷츄가 있다.

 

1) 제법 어둑해졌지만 운동장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많았다.
2)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3) 일몰에 붉게 물든 닷츄

 

저녁이 되면서 섬의 분위기는 더욱 차분해졌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거기까지였다. 깜깜해진 섬에서 이내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와 각종 건물이 밀집해 있던 곳을 빠져나오면서부터 헤매기 시작했는데, 결국 가장 바깥 도로까지 걸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걷기도 많이 걸었고, 오늘 하루는 이동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뭐라도 빨리 먹지 않는다면 쓰러질 것 같았다.

 

해가 지면서 이에섬은 고요하고 적막해졌다.  

 

마침 지도를 살펴보니 근처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방향을 잡고 걸어들어가는데, 어느 순간 주위는 자판기와 보름달만 빛나고 있었다.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에,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찾고 있던 식당의 간판이 나왔다. 하지만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영업종료였는지, 쉬는 날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깜깜한 동네를 지나면서 진작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시 지도를 펴들었다. 워낙 깜깜했기 때문에 간판을 더듬으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상으론 분명히 멀지 않아 보였는데, 섬의 제일 바깥쪽 도로를 타고 빙 둘러 나와서 그랬는지 걸어도 걸어도 게스트하우슨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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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식당을 찾아 갔더니 나를 반겨주는 건 외로운 자판기 하나…

 

그러고보면 여행 첫날 일정이 꽤나 빡빡했다. 오전부터 공항으로 이동해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 그리고 공항에서 나고 버스터미널로, 다시 터미널에서 모토부항으로 이동해 이에섬까지 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계속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반값 여행’에 너무 들떠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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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던 에이스버거. 사진만 봐도 그때의 절박함이 떠올라 울컥한다  

 

간신히 숙소 근처로 돌아왔을 땐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겼다.  숙소 인근에는 Pub이 있어 쿵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주, 많이, 매우 지쳐 있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식당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만난 ‘에이스 버거’. 가이드북에 의하면 에이스 버거는 그 당시 37년, 올해 개점 40년을 맞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 역사만큼 빛바랜 느낌은 있었지만, 구석 구석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키나와에는 유명한 음식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는 스테이크도 있다. 사실 스테이크는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미국이 통치했던 27년 동안 유입된 미국 문화가 오키나와 식단에도 영향을 끼쳤고, 스테이크는 이를 대표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스테이크가 오키나와의 명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양질의 소고기도 큰 몫을 담당했다. 오키나와 아래 지역인 이시가키(石垣)산 소는 엄선된 재료로 사육 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이를 재료로 사용한 스테이크는 맛도 역시 좋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본의 명품 소인 고베(神戸) 소의 원종이 바로 이시가키산 소이기도 하다.

 

평범한 스테이크였지만,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에이스 버거는 이에지마산 소고기로 만들어진 햄벅스테이크를 취급한다. 가이드북에는’B급’이라고 평했지만, 접시까지 씹어 먹을 기세였던 나에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단연 최고였다. 여기에 밥도 한 그릇 추가해서 먹었다. 허겁지겁 먹어대는 관광객이 안쓰러웠는지,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는 시원한 물도 한 잔 주셨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욱씬 거리는 다리와 허리를 뜨끈한 물에 한 번 지졌다. 가이드북을 보며 내일 일정을 확인하고 피곤한 몸을 방바닥에 뉘였다.

지난 여행기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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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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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자의 운영자. 얼마 전 육아의 늪에 빠져든 이후 당분간 여행은 포기했다. 해묵은 여행 사진을 뒤적이거나 남의 여행기를 탐하고 있다. 기고는 언제나 대환영! contents@travelwri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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