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Lazy
“나, 한국 날씨를 잊은 것 같아.”
하늘 아래에서 땅의 표면까지 느리고 가볍게 추락하는 치앙마이 낮의 더운 공기. 뜨거운 햇빛과 함께 나의 몸도 나른해지고 테이블에 붙어 축 늘어진다.
멀뚱멀뚱한 눈을 깜빡이며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아지랑이의 물결을 따라 밖을 바라본다. 딱 지금이 좋아. 아무 걱정 없으면서도 게으르고 완벽한 순간이야. 내가 돌아갔을 때도 모든 날이 오늘만 같으면 좋을 텐데.
내가 한국 날씨를 잊은 것처럼 지금의 느낌을 잊게 된다면 조금 슬플 거야.
25 Tablu
Bon, DeeDee, How, LerLee, Tablu…
첫날 예약해뒀었던 코끼리 보호소 투어. 허름한 유니폼을 입고 나무 의자에 앉았다. 코끼리 언어를 배우는 게 시작이다. 사람처럼 코끼리에게도 언어가 있다.
Bon은 먹이를 줄 때, DeeDee는 일종의 칭찬이다. ‘잘했어’ 정도의 뜻. How는 코끼리의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를 때 멈추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LerLee는 먹이 가방이 비어 더 이상 줄 수 없을 때 하는 말인데, 실제로 가방에 먹이가 떨어져서 ‘LerLee’ 라고 말했더니 신기하게도 바로 행동을 멈추고 다른 먹을거리를 찾았다. Tablu는 Thank you. 혹은 Good bye. 고마워, 잘 가.
신기한 건 또 있다. 코끼리도 우리처럼 웃는 얼굴을 하고서 기뻐할 줄 안다. 친구나 가족이 이 세상을 떠날 때면 슬퍼한다. 물속에 잠긴 채 목욕하는 것도 좋아하고 천연재료로 따뜻한 마사지를 받는 일도 좋아한다. 기분이 좋으면 물을 뿜으며 장난을 치며 심지어 긴 코로 나를 안아주기도 한다.
코끼리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 만약 당신이 치앙마이에 간다면 코끼리를 타지 말고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썽태우를 타고 떠날 때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코끼리들에게 힘차게 외쳐보자.
“Tablu elephant!”
26 Last
치앙마이에 있으니 하루하루의 시간이 금방 달아나버리는 기분이다. 덕분에 밤은 항상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그래서 머무는 내내 아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다.
숙소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아까운 시간. 해가 지고 완전한 밤인데도 오늘도 올드타운 주변을 서성인다.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하기엔 지겹지 않은 반복, 아니 일상이다.
분수대 앞에 앉았다. 물방울을 튀기며 물이 솟아오르는 건 가만히 바라본다. 문득 이 순간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 깨지 않을 꿈이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본다. 행복한 기억될 행복한 순간들.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서 유난히 그런 걸까?
27 Untitled
전날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에 와서 잠을 제대로 자본적이 없는 탓인지 칵테일을 반의반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벌써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5바트짜리 화장실을 찾아가는 걸음마저도 비틀거렸다. 시야가 두 개로 겹쳐진다.
역시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일까. 몸속에 알콜을 들이부어도 텐션이 생각보다 쉽게 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실수록 오히려 더 울적해지는 기분이다.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여러 생각이 엉켜 붙었다. 뭔가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은 기분이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속이 따갑고 어지러워져 온다. 그래도 슬슬 기분은 좋아지고 있는 건가?
사실 내 마음을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내 마음인데도.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없다. 취해서 혼란스러운 것뿐일까.
28 Morning, Again
커튼 사이로 얇게 들어오는 아침의 햇빛이 여느 때와 같았다. 나를 반겨주는 웃는 얼굴들도 변함없다. 타는 목을 축이는 생수 한 병의 청량감도 그랬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끝없이 생긴다.
29 Film
짧게 머물렀지만 꼬리가 꽤 길어진 추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누군가와 마주 보고 앉아 처음 운을 뗐을 때, 스쿠터를 타고 달리던 길, 처음 마셔봤던 칵테일들, 배고파 먹기에 바빴던 점심과 저녁의 음식점들, 님만 해민의 화려한 불빛들, 무작정 걸어 다녔던 올드시티의 거리들.
공항에서 서로 인사를 건네며 반대쪽으로 돌아섰을 때 눈물을 꾹 참았다. 겨우 이 정도로 우는 어린아이가 되긴 싫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될 내 얼굴이 울상인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가 않으니.
한껏 복잡했던 기분이 지나간 뒤, 공항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맥이 배웅하러 나왔다. 아마 내가 다시 태국으로 오는 날까지 우리는 SNS로 연락하는 게 전부겠지. 조금 더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공항 천장을 뚫고 하늘을 마구 찔러댔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게이트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서 맥의 필름 카메라로 우리는 또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나는 이 카메라로 추억들을 남겨둬.”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소중한 추억. 맥의 이 한 마디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야기를 한마디씩 나누며 걸음을 뗄 때마다 점점 게이트와 가까워졌고, 검색을 앞에 두고 이제는 진짜 헤어져야 한다.
“이제부터는 같이 가지 못할 것 같아.”
“Good bye!”
내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 몇 번이나 다시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슬퍼하는 안녕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아쉬움은 담아두기로 했다. 대신 만나서 진심으로 기뻤다는 마음만 전하고 싶었다. 물론 마냥 해맑게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런저런 절차를 마치고 게이트 앞에 섰다. 복잡하고 묘한 감정들이 또 한 번 밀려왔다. 그 순간 울리는 휴대폰의 알람.
‘Good bye라는 말을 하지 못했어. 우리가 만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Good bye라는 말은 조금 더 아껴둘 걸 그랬나 보다. 밤하늘에 풍등이 날릴 때 즈음에 이곳에 다시 돌아올게.
고마웠어 나의 치앙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