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Dinner Time
“밥 한 번 먹기 되게 힘드네!”
원님만 커뮤니티몰.. 호기심에 입구로 쏙 들어갔는데 모든 코너를 돌고 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중간에 출구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꼬르륵거리던 배를 잡으며 신나게 쇼핑을 해야만 했다. 속옷 코너가 등장했을 때 꽤 당황스러웠다. 나는 몇 걸음이나 더 앞서가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출구를 겨우 찾아낸 우리는 서둘러 식당가로 향했다.
우리가 점찍어뒀던 음식점의 이름은 ‘김군네 치킨’이었다. 온통 태국어로 가득했던 원님만(One Nimman)에서 한글로 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침 슬슬 한식이 그리워지고 있었던 참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메뉴판을 펼쳤다. 그리웠던 음식의 이름들을 마구 불러대며 주문을 했다.
한글이 적힌 메뉴판, 한국의 음식, 한국적인 분위기. 이렇게 있으니 태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다 먹고 난 뒤에 노래방까지 가줘야 제맛인데. 그렇지?”
한국 사람과 낯선 나라에서 한국 음식 이야기를 하고, 한국식 코스를 읊으며 당장 가지 못할 곳들을 상상한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렇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태국인 직원 한 명이 오뎅탕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주 경쾌하게 ‘오뎅탕!’을 크게 외치며 말이다.
하지만 그 오뎅탕은 우리가 주문한 게 아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갸우뚱거리는 우리의 표정을 본 직원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지었던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앞 테이블로 자연스럽게 걸어 나갔다.
사실 나는 서비스인 줄 알고 머릿속으로는 이미 춤을 추고 있었다. 웃음이 터졌다.
해맑은 표정으로 오뎅탕을 외치며 걸어오던 그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친근했다. 하마터면 손을 내밀고 받을 뻔했다. 이곳의 이런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활기 넘치는 직원들과 웃음이 넘치는 가게 분위기.
오래간만에 배부른 식사를 마쳤다. 포만감 가득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음식값을 계산했다.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오뎅탕을 외쳤던 직원의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I like your earring!”
굿바이를 대신한 나만의 인사였다. 가게 밖으로 나섰다. 배도 채웠으니 이제 올드시티로 돌아가 볼까.
18 Parade
횡단보도에 서 있는 모두가 초록 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도로와 신호등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린다. 도로 위에는 여러 개로 신호등이 나누어져 있어 초록불이 들어와도 선뜻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나를 비로샣 횡단보도에 서 있던 모두가 외국인이었다. 초록불을 두고도 건너지 못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치를 보던 중, 누군가가 당차게 건너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지나가던 치앙마이 주민인 듯했다.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모두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멋쩍은 미소가 아닌 웃음꽃이 핀다. 횡단보도 위로 행진이 이어진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까지.
19 Somewhere Only We Know
거리에서 갑자기 Keane의 노래가 들려왔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저 너머에서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나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노래였다. 힘이 필요할 때면 아껴 들었던 노래.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됐을 때의 기분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모두가 각자의 노래 하나쯤은 갖고 있을 텐데, 이곳의 누군가에게도 그런 의미였을 테지.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다. 고생 많았다며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살면서 겪은 모든 일이 연결고리처럼 이어져 이 순간 빛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노래와 반짝이는 조명. 카페테라스에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웃는 사람들. 더 바랄 게 없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야. 고마워요.
20 Trip Alone
“혼자 하는 여행이 좋아.”
“나도 그래. 넌 이유가 뭐야?‘
원한다면 늦게까지 맛볼 수 있는 단잠,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 있다는 여유로움,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타인에게 묶이지 않는다는 자유, 마음만 열려있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여행자들.
우리의 대답은 같았다. 마음이 통하는 지점을 하나씩 찾아가다 보면 이야기는 점점 깊어져 간다. 때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과 해가 질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들을 나누는 게 친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보다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까만 하늘의 색을 잊을 정도로. 오늘만큼은 나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21 Let’s Drink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밤이 됐다. 세븐일레븐에서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어 호스텔로 돌아왔다.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니 시원한 소리를 내며 캔 뚜껑이 열린다.
창밖에는 멋진 야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혼자 맥주를 마시니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맥주도 한 캔으로 아쉬웠다. 그래서 한 잔 더 마실까 싶었지만 혼자서 또 마시자니 내키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의 음주는 포기하기로 했다. 깜박 잊고 있었던 모기 연고를 사러 지갑을 들고 다시 세븐일레븐으로 향했다.
늘 그랬듯 길 끄트머리에 멍하니 서서 맞은편으로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니키, 맥!”
늦은 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나의 태국 친구들. 우리는 서로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반갑게 달려갔다.
“여기엔 웬일이야? 난 혼자 맥주 마시고 있었어! 더 마시고 싶었는데 함께 마실 사람이 없네!”
“정말? 우리도 마시고 있었어! 우리 같이 Drink?”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미 알딸딸해져 신나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오늘 밤을 계획했던 것보다 더 길게 즐기기로 했다.
니키는 편의점 맥주 코너 앞에서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태국 맥주’라며 ‘창(Chang)’을 건네줬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오늘은 더 이상 술을 구매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급하게 계산을 했다. 한국과는 달리 태국에서는 자정이 넘어서 주류 판매는 금지된다.
우리는 사이좋게 손에 맥주를 한 캔씩 들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Are you okay? You’re already drunk!”
취했다며 맥을 신나게 놀려댔던 셋 중에서 가장 먼저 취했다.
“이것 봐, 나 지금 취했는데도 한국어로 말 안 했어! 다 영어였어! 해외 생활 벌써 적응했나 봐!”
쉴 틈 없이 재잘대고 호들갑을 떨며 까르륵 거리다가 넘어질 듯 말 듯 비틀거렸다. 중심을 겨우겨우 잡다 결국엔 맥의 등에 업혀 새벽에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너무 창피했던 나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서 3일 치 마실 물을 모조리 들이켰다. 새벽 내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것 같지만, 사실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날 새벽은 재밌었다. 셋이 다시 만난다면 ‘그때처럼 다음에 또 한 잔 어때?’ 라며 제법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