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pecial Morning
방콕에서 치앙마이까지 먼 거리를 날아온 맥과 니키를 만났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아침을 먹기 위해 카오소이(Khao Soi)를 파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뒤 선물을 주고받았다. 귀여운 캐릭터 양말과 마스코트가 그려진 포스트잇, 알록달록한 코끼리 바지.
태국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 한 테이블 안에서 섞인 세 개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았다. 가끔 서로가 알아듣지 못해 멀뚱멀뚱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종이와 펜을 꺼내 들어 해결한다. 그래서 우리가 소통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꾹꾹 눌러쓰는 글씨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건넬지 궁금했다. 기분 좋은 설렘이다.
옆자리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Where are you from?“
어제처럼 망설이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싫었다. 이번엔 먼저 용기 내어 인사해보기로 했다.
“저 한국인이에요!”
나는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그쪽을 노스게이트에서 봤어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다음 날 다시 만났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넓디넓은 세상에서 인연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 그래서 반가움은 감추지 않기로 했다
기분 좋은 우연으로 시작한 나의 둘째 날 아침.
13 Take Your time
호스텔 옆에는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볶음밥을 잘했다. 메뉴판을 받는 데만 10분이나 걸린다. 주문까지 받으려면 다시 10분이 걸린다.
“여기 식당은 대부분 이래.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어. 줄 서 있다가 못 참겠으면 다른 거 먹으러 가는 거지 뭐.”
“정말? 만약 한국에서 이랬으면 아마 난리 났을 거야. 우리는 뭐든지 빨리빨리 해치우니까!”
나보다 고작 며칠 더 머물렀던 경력이었지만 이제 막 도착한, 치앙마이 햇병아리였던 나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무엇이든 서둘러 해치우는 습성 때문이었는지 배가 너무 고파서였는지 모르겠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손가락으로 식탁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입에선 배고프다는 투정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투정 부린다고 음식이 빨리 나올 리가 없었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많은 것이 보인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알록달록한 사원,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는 썽태우, 또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 스쿠터를 타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
그렇게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렇게 주위를 둘러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단 몇 분이라도 여유 있게 세상을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늘 목표에만 치여 살았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가리고만 살았다. 평범한 이 풍경이 벅차오르고 감사한 장면인지 이제야 알았다.
여기서만큼은 나를 잠시 놓아줘도 되지 않을까. 이곳엔 나를 줄 세우는 사람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평가하는 사람도 없다. 지긋지긋했던 뒤늦은 미술 입시도,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던 나도 이곳에는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고개를 들자. 웃어보자. 묶었던 머리를 풀고 바람을 느껴보자. 공기에 실려 오는 향기를 맡자.
언제 나올지 모르는 점심이었지만 더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평화롭고 느긋한 거리 풍경은 창을 스크린 삼으니 단편영화가 된다. 여유에 취해 콧노래가 나올 때쯤 식탁 위에 주문한 음식이 도착한다. 소중한 순간은 늘 곁에 있었다. 그걸 잊지 않는 방법을 여기서 배운다.
14 선물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 분홍색 꽃이 담겨있는 예쁜 팔찌. 꽃이 참 예뻤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어떤 게 좋을지 고민했을 그 마음이 떠올랐다. 오늘 이 순간이 그리워질 때마다 팔찌를 차야겠다. 언제든 추억할 수 있도록.
15 Green
“여기 넓지는 않지만 엄청 Green해!”
그랩을 타고 니키, 맥과 함께 찾아간 치앙마이 대학교. 동화 속 어딘가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탄 차는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 같았다. 초록 숲을 좋아하는 나는 초록 가득한 학교 안으로 향하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발을 디딘 곳은 숲처럼 온통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동화책의 그 장면들처럼 작은 요정들이 나타날 것 같았다. 책 속의 그들은 언제나 길 잃은 나의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피터팬과 어린 왕자, 늘 넘어졌던 나를 일으켜 세워줬던 작은 친구들. 잊고 있었던, 혹은 떠났다고 여겼던 기억들이었는데, 스물의 철부지가 돼, 쌓아뒀던 마음의 짐을 내려두고 달려온 곳에서 다시 마주했다.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마음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떠났던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현실 앞에서 늘 조급했고 도망가기 바빴던 나였다. 피터팬과 어린 왕자의 이야기는 어느 구절 하나 변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어디 하나 닳지 않았다. 여전히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열세 살의 나를 토닥여주고 싶은 날이었다.
“이거 태국에서 인기 엄청 많은 사탕이야!”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치앙마이 대학교의 커다란 호수가 등장한다. 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니키가 준 사탕을 나눠먹었다. 그때 가방 속에 넣어둔 마이쮸가 생각났다. 치앙마이에서 친구를 사귀게 되면 꼭 나누어주리라 다짐하며 챙겨뒀었다. 딸기맛과 포도맛, 두 종류였다.
“나는 포도맛”
내가 마이쮸를 꺼내 들자마자 니키는 재빠르게 포도 맛을 집어 들었다. 나도 포도 맛을 좋아했다. 니키에게 우리는 같은 취향을 가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신나서 수다를 떨고 있으면 맥은 웃으며 필름 카메라를 꺼내어 든다. 햇빛에 반짝이는 아스팔트, 윤슬, 서로 다른 우리의 머리카락 끝 색들. 이런 찰나들을 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여운이 가득하다. 초록빛으로 흠뻑 물든 오늘을 맥의 메모리 속에 담았다.
16 I See the Light
나는 생각보다 더 겁쟁이다. 밤에도 주위를 밝혀주는 빛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늘 작은 조명을 켜놓고 잠자리에 든다. 나에게 빛은 작으면서도 아주 큰 구원이다. 아무리 작은 빛이어도 내가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토닥여주니까.
빛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어두움과 두려움을 한 줄기의 빛으로 밝혀주고 싶다. 당신이 다른 모습으로 힘겹게 포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 수 있도록.
타인을 위한다는, 혹은 의식해야만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숨기거나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그대로 선명히 빛나길 바라는 마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