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North Gate
“재즈 바에 가보고 싶어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여기만큼은 꼭 가겠다고 점 찍어뒀던 곳. 치앙마이의 North Gate Jazz Co-op.
‘하늘이 완벽하게 어두워질 즈음 맥주 한 잔을 시켜 테이블 위에 올려둘 거야. 바 안은 재즈로 가득 차 있겠지. 그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맥주를 마실 거야. 이곳이 치앙마이라는 걸 마음껏 느낄 수 있게’, 라고 다짐했던 곳.
밤 아홉 시 정도면 공연이 시작될 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맥주잔을 올려둘 테이블은커녕, 앉을 의자 하나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재즈 바의 바깥에 서서 음악을 감상했다.
밴드는 서로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연주를 이어갔다. 객석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리듬을 타며 까딱거린다. 재즈 바의 안이 훤히 보인다. 안이 아니라 바깥쪽에 서 있었기에 한눈에 담을 수 있었던 모습들. 이렇게 보니 이 자리도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이곳의 붉은 벽지도 마음에 들었다. 따스한 여름밤의 공기와 분위기가 따뜻한 온도를 가진 색의 벽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두 다른 곳에서 왔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어깨춤을 춘다. 음악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할 때면 다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다. 누군가는 그 두근거림을 기대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아보기도 한다. 음악의 끝에는 다 같이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나중에 맥주 마시러 갈까요?”
“완전 좋아요!“
입이 귀에 걸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무리 평범한 질문이라도 이곳에서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작지만 시원한 바람이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소하지만 완벽한 나의 한여름 밤.
09 Cheap thrills
Sia의 노래가 들려오는 길을 따라 걷다가 처음 보는 바에 도착했다. 설레었다.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음주가 막 허락되기 시작한 스물이니까. 게다가 해외에서 마시는 첫술!
어차피 다 똑같은 알코올인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받아 든 메뉴판에서 익숙한 이름이라고는 보드카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What’s your favorite?”
직원의 귀를 빌려 조심스럽게 건넸던 나의 질문.
“umm… It’s my favorite.”
그는 손가락으로 보드카가 들어간 칵테일을 가리켰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드카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걱정 반, 기대 반. 마른 침을 몰래 삼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주문했다. 이왕 추천받은 거 한번 시켜보자는 마음으로 태연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그럼 이걸로 주세요”
“이게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거래?”
“아니, 저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해서 주문했어.”
그렇게 주문하면 어떡하냐는 구박을 받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첫 주문을 마쳤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며 킥킥 웃었다.
알 수 없는 보드카가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술맛이 진했다.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결국 맞은편에 있던 콜라 향이 진한 레몬 칵테일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몇 잔을 비웠다.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한잔 더’라는 주문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볼이 봉숭아 물 들 듯 발그레해졌다.
“나 취했나 봐. 자꾸 테이블에 엎드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모두가 여기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걸.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그저 술이 마시고 싶다면 술을 마시면 되는 거고, 춤을 추고 싶다면 춤을 추면 되는 거야.
‘단돈’이라는 값을 주고 목 뒤로 넘기는 알싸한 칵테일. 겨우 이 정도 돈으로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거야? 나 사실은 말이야, 나중엔 기억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작은 수다들조차도 너무 즐거워서 당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10 The Night
“그거 알아요? 여기, 밤에는 커다랗고 사나운 들개들이 돌아다닌대요.”
이런 얘기를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말이다. 물론 그때는 해가 떠 있을 때였다. 치앙마이의 밤이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가로등 개수는 한국의 절반만큼이나 적어서 까마득하게 어둡다.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하필 이 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겁쟁이 of 겁쟁이였던 나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들개를 경계해야 했다. 당당하게 펴고 거닐던 어깨는 잔뜩 움츠렸고, 온몸의 털끝이 바짝 서 있다. 눈동자도 제 마음대로 굴러다닌다.
“악! 방금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
옆에 있던 그의 팔을 붙잡으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쥐가 지나갔을 뿐이라고 웃었지만, 사실 쥐 역시 질색이다.
나는 매일 인적이 드물어진 밤거리를 지날 때마다 작은 소리에도 몇 번이나 깜짝깜짝 놀라야 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밤거리를 두고 돌아가는 게 아쉬워 늦장을 부렸다.
“무서운 거랑 좋아하는 건 별개라니까. 정말이거든.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거리가 너무 좋으니까.”
까마득한 어둠이 드리운 데다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아 무서운 길. 하지만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만 있는 것처럼 걸어다니는 건 참 좋다.
11 Every Morning
낯선 곳에서 청하는 잠은 늘 깊이 빠져들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난 거의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잠에서 깨었을 땐 아침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잠을 다시 청하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문득 이곳의 이른 아침이 궁금해졌다. 어떤 바람이 불고 어떤 공기가 와 닿을지. 이 호기심을 해소하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게 뻔했다. 나는 재빨리 샤워실로 들어가 씻고 머리를 묶은 뒤, 무작정 아침 산책을 나섰다.
도로 위는 평소와는 달리 거짓말처럼 한적했다. 낮과 밤에는 구경할 수 없었던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맨다리와 맨 팔에 닿아 전해지는 기분 좋은 치앙마이의 바람. 저녁보다는 조금 차분해진 카페와 휑하니 비어버린 도로 한가운데 놓여있는 커다란 분수대를 바라본다. 느긋한 아침에 스스로에게 준 작은 숙제.
내가 행복한 이유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플레이리스트에서 랜덤 재생을 눌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일처럼 우연하고 소소한 기적들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다. 작은 일에도 매일 기뻐하는 것. 그것이 전부지만, 우리는 그런 작은 것들이 채워진 매일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