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나에게 열아홉의 내가 주었던 첫 선물 – 태국, 치앙마이
00 갈증 해소
나는 늘 목 마른 아이였다. 타는 듯한 이 갈증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가슴 안쪽을 파고들 뿐이었다. 그런 열아홉의 나에게 주어진 공간은 ‘책상 앞’뿐이었다. 학교 책상 앞, 독서실 책상 앞, 미술학원 책상 앞. 어쩔 수 없이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엉뚱한 상상들이 나를 찾아왔고 설레발치게 만들었다.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인연들이 세계 곳곳에 숨어있겠지?’
한국에서는 별난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나도 다른 나라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몰라. 나는 얼마나 더 많은 나무를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이 하늘만은 어디에서 올려다보든 변함없겠지?
이어폰에서 작게 울려 퍼지고 있었던 영어와 프랑스어가 새삼스레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상했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 음성들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왜 사서 위험한 행동을 하려고 하니?”
모두가 나에게 무모하다고 말했다. 난 체구도 작은 어린 여자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언어도, 환경도, 사람들도 모든 것이 낯선 땅으로 늘 떠나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아닌, 홀로. 그래야만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날 부르는 낯선 언어와 목소리들 사이로 지금 당장 달려가야 할 것만 같았다.
몇 권의 문제집들과 몇 장의 도화지에만 시선이 꽂혀 있었던 나의 앞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 인생의 또 다른 시작점은 과연 어디일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 이런 고민은 더는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무작정 떠나보면 알게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거라고 믿었다.
합격 통보를 받았던 12월, 러시아는 한국보다도 더 추운 날씨였고, 호주에서는 산불이 거듭되고 있었다. 저녁부터 아침이 밝을 때까지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으며 여행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열아홉의 나는 계획에도 없던 치앙마이로 떠나기로 했다.
01 출발
어떤 목소리였을까? 나를 이 하늘 위로 데려다 놓은 건. 그 목소리는 나를 홀로 공중에 띄워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또 다른 나를 찾으러 떠나는 길. 수놓아진 새하얀 구름 위에 푹 빠져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좋은 착각에 계획 없는 여정을 떠난다.
02 Arrival
“Taxi? Taxi?”
공항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길을 잃었다. 국내선까지 걸어가 멀뚱멀뚱 서 있던 나를 붙잡고 누군가가 물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그는 택시기사였다. 우리는 택시비를 150바트로 합의를 본 뒤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You know… There is a Famous Kingdom!”
딱 봐도 햇병아리 관광객인 나에게 그는 조금은 서툰 영어로 나름의 자랑스러운 곳을 설명하고 있었다. 영어만으로는 답답했는지 중간중간 낯선 태국어도 튀어나왔다.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이곳을 소개해주려는 그 정성이 참 고마워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치앙마이의 택시가 출발한다. 기본요금 3,300원의 한국 택시가 아닌 150바트로 미리 흥정해둔 치앙마이 택시. 나는 한창 호기심 많은 다섯 살 아이처럼 창문 앞에 딱 달라붙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의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꽤 흥미로웠다. 헬멧을 쓰고 스쿠터 위에 앉아 도로 위를 달리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다. 나도 타고 싶었지만, 스쿠터는커녕 두발자전거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저 사이를 함께 달리지 못하는 아쉬움에 속으로 괜히 투덜거렸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다음을 다짐해본다.
‘다시 올 때는 꼭 스쿠터를 배워와야지!’
03 Start
오전 열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택시를 타고 숙소 바로 앞에 도착했다. 나는 몸집만 한 배낭을 끌고 카운터 앞으로 가 체크인을 했다. 내가 지낼 곳은 3층에 있는 깔끔한 도미토리.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곳이라 배낭을 메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래도 올라가는 중간마다 있는 큰 전신 거울과 푹신해 보이는 소파들이 마음에 들었다. 발걸음 가볍게 계단을 올랐고 도미토리의 방문을 열었다.
내 침대는 창문 바로 앞에 있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문 밖으로 치앙마이의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모두가 여름옷을 입고 있다. 1월의 한국과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그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아, 나 정말로 태국에 있구나.’
커다란 배낭은 락커 안에 꽁꽁 숨겨두고 작은 보조가방은 침대 위에 내팽개쳐 버렸다. 하얀 이불 위에 대자로 누워 이불만큼이나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줄곧 상상만 해왔던 일을 결국 행동으로 옮겨버렸다는 걸.
‘나 생각보다 용감하잖아?’
스스로 뿌듯해하며 피식거리던 순간, 휴대폰의 알람이 쏟아졌다. 정말로 갔냐며 놀란 친구들의 물음과 잘 도착했냐는 소소한 안부들. 다시 한 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공항에서부터 입고 온 긴 옷들을 벗어던지고 짧은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다. 이제 몇 달 만의 여름을 맞이하러 나가볼까.
04 낯선
도미토리 방을 나서면 햇볕이 따스하게 드는 로비가 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꺼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서 그 순간에 새기고 싶었다.
“Hey! how are you?”
테이블에 앉은 채로 처음 보는 친구와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이곳은 어딜 가도 낯선 이들뿐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이방인이자 여행자라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무엇이 우리 모두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이끌었을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