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휴가가 없다. 일이 없는 프리랜서+자영업자의 설움이지 뭐. 주어진 일부터 차곡차곡하다 보면 누군가 알아봐 줄 거라고 믿지만, 자유의 대가가 가난이라는 건 정말 참기 힘들다. 연말까지 눈 딱 감고 기다려 보려고.
아무튼, 심심해서 옛날 여행사진 들 찾아보다가, “놀면 뭐 하냐, 이거라도 올려야지” 싶어서 [ 여행의인상]이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팠다. 여행지 현장에서 느끼는 감성을 생생하게 풀어내는 류는 나는 잘 못하고, 그렇다고 데이터 위주의 여행정보도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 아니라 못한다. 그냥 사진들을 돌려보면서 당시의 인상을 떠올려 보고 주절대는 거, 어쩌면 그게 나에게 온전히 남은 인상 아닐까.
아난타라 마이 카오 푸켓 빌라
아난타라는 2001년 설립한 태국 마이너호텔의 메인 브랜드. 사업이 꽤 잘 되는 모양(1년 내내 돌리는 관광지가 본진이니 뭐), 중동남 아시아 권역에서 빠르게 확장 중이고, 얼마 전에 한국에도 아바니 호텔을 런칭했다. 우리가 찾은 마이카오 빌라는 이른바 5성급.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른 데도 가고 싶어서 여기는 하루만 묵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땅을 치고 후회함. 여기서 3일 내내 숙박했어도 괜찮았겠다 싶음. 내가 추구하는 호스피탈리티의 교과서.
일단 리셉션부터 아주 편안하다. 마치 쥬라기공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좁고 긴 입구를 지나면, 확 트인 커다란 연못 안에 어두운 색깔의 목조로 마감한 정자를 만들어 뒀다. 사람들이 워낙 환하게 반겨줘서인지, 들어가자마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파에 푹 기댈 수 있다.
사실 나는 쫄보라서 일반적인 호텔의 으리으리한 로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 편안함보다는 과시에 초점이 맞춰진 공간이라, 빨리 방으로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 마이 카오 빌라는 전혀 교만을 떨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 불편하게 굽신거리지도 않는다. 사실, 태국의 인상이 대개 그렇다. 이 나라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만, 충분한 자부심이 느껴져서 미안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빌라촌 규모가 꽤 크다. 꼭 정글을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어디서든 인터폰으로 버기를 부를 수 있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걸어 다녔다. 새소리도 정말 좋고. 이런 환경인데도 쾌적한 건, 매일 새벽 실시하는 방충 작업 덕분이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곤충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도마뱀류와 새들이 많은 걸 보면 신기하기도. 온혈동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피네트린 계열의 살충제 덕분인 듯.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담아본 푸켓의 소리들. 삼각대를 안 가져가서 잠깐 망설였는데, 이곳의 조용하고 깨끗한 정취가 너무 좋아서 핸드헬드로 대충 담아봤다. 이런 소리 속에서 깨어 아침을 맞는다는 건, 어디 비할 데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느 영화 도입부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짝꿍이랑 5년째 연애만 하고 있다. 우린 평생 결혼 안 할 것 같아서 신혼여행 겸 고른 여행지가 푸켓이었다. 총 4박 6일의 일정이었고, 예산은 400 남짓. 어릴 때는 사진에 욕심도 많고 호기심도 많아서 새로운 곳, 신기한 곳을 가고 싶어 했다. 근데 직장생활에 치이다 보니 점점 휴양에 관심이 생기더라. 아저씨라 그런 건가. 요 근래 제일 하고 싶었던 건, 추운 한겨울에 적도 휴양지에서 쉬다 오는 거. 조만간 하지 싶어.
때로 아무 생각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보통 여행의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떠나는 편이다. 그리고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저 때는 경치 좋은 데서 푹 쉬면서 마사지 받고 맛있는 거 먹고 돈 펑펑 쓰는 게 제일 하고 싶었다. 뭐, 펑펑 쓴다고는 해도, 11개월 동안 월 20 정도 둘이 꾸준히 모으면 벌써 440이다. 막상 땡기려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일 년에 딱 한 번 신나게 놀고 평생 추억 만든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적당한 수준. 그런 목적의 휴양이라면, 이런 호사는 분명 도움이 된다.
밤이 되었습니다
대충 시켰다. 태국에서의 식사는 늘 즐겁다. 어디나 기본은 하는 느낌. 상당히 대범한 문법을 가진 퀴진인데, 편안하게 요리들 참 잘한다. 솔직히 저 날 식사의 맛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베테랑 서버의 정겹고 친절했던 표정과 신나는 목소리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여행의 인상이란 건, 이런 보이지 않는 컨텐츠가 훨씬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 아닐까. 사진을 봤을 때 떠오르는 그 시간의 경험과 감정들을 채우는 건 과연 뭘까. 국내 여행지들도 이런 고민을 해줬으면.
돌이켜보니, 참 꿈같은 밤이었구나. 다음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