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 해 일주 #4, 우리 여기서 눌러살까? – 멕시코, 툴룸

감탄,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묵었던 방은 다시 고양이의 차지가 됐다

 

오늘을 흐리다가 해 질 녘이 되니 맑아진다. 건기에 접어들어야 하는 11월 말인데도 아직 날씨가 오락가락하다. 건기라고 믿고 이번 주에 칸쿤으로 신혼여행 오는 부부들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유적지 관람하기엔 아주 좋은 날씨다.

아침부터 부부의 방을 습격한 호랑 무늬 고양이와 신랑의 치열한 사투 끝에 고양이도 우리 방에서 나가고 우리도 그 만화 속에 나올 법한 재미있는 호스텔을 나왔다. 결국은 다시 고양이의 차지가 되었으니 우리가 진 셈이다. 하지만 문제없다. 더 저렴하고 좋은, 게다가 아침까지 포함된 호스텔을 구해 들어왔으니!

 

천천히, 이십 분 정도를 달리니 툴룸 유적지 입구가 나온다

 

툴룸(Tulum) 둘째 날, 두 번째 호스텔에 짐을 풀고 자전거 렌트숍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오늘 목적지는 툴룸 유적지(Tulum Ruins). 툴룸 시내에서 유적지까지는 약 4km 정도라고 한다. 다른 관광지에 비해서 길이 잘 닦여 있어서 자전거 타기에 딱 좋았다. 거기에 날씨까지 살짝 흐려주니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다.

 

유적지 입구에 있는 나무는 졸지에 자전거 주차장이 됐다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 바로 앞까지 들어갔다. 자전거 주차장에는 세 대밖에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온 우리 같은 배낭족들이 너무 많아서 이 나무, 저 나무마다 자전거가 한두 개씩 모두 달려있다. 나무에 억세게 묶어놓은 모양새가 내키지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부의 자전거도 커다란 나무 기둥에 기대어 묶어 놓았다.

작은 유적지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매표소에는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표를 사는 데에만 10분 이상이 걸렸다. 칸쿤 호텔 존에서도, 배낭여행자들의 호스텔 존에서도, 저 멀리 붙어있는 멕시코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티켓을 보여주고 툴룸 유적지로 입장했다.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파랑새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리는 노랗고 머리는 검고 날개가 파란 새였다. 나중에 그림에 꼭 그려 넣고 싶어 카메라에 담았다.

 

작은 입구를 지나면 툴룸 유적지가 나온다

 

눅눅한 숲에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토르티야를 나누어 먹는 새와 라쿤, 이구아나를 볼 수 있었다. 숲을 지나니 높이가 2m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그러나 매우 두텁게 쌓아 올린 돌담이 나타났다. 돌담 사이로는 한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입구가 있다. 이곳을 통해 수백 년 전 마야(Maya)인의 요새인 툴룸 유적지로 들어간다.

13세기에서 15세기경, 카리브 해의 요새이자 벨리즈(Belize)를 오고 가던 무역선들이 머물던 항구로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던 툴룸. 마야어로 ‘벽’이라는 뜻의 툴룸은 그 이름처럼 눈부신 카리브 해를 안고 있는 절벽 위에서 벽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을 것이다.

 

‘와, 어떻게 이런 명당을 찾아와서 도시를 건설할 생각을 했을까?’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의 태양의 피라미드를 봤을 땐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랐다. 치첸이트사(Chichen Itza)를 둘러보면서는 마야, 톨텍(Toltec)인들의 지혜와 건축학적, 미적 정교함에 놀랐다. 그리고 여기 툴룸 유적지에선 마야인들의 부동산적 안목에 감탄, 또 감탄했다. 나의 여행기에서도 자주 언급되지만, 미국인들은 좋은 곳이라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다. 하지만 마야인들은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툴룸의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 그냥 여기서 호스텔 하나 차리고 살까?’ 했던 것처럼, 마야 부족의 족장이었던 누군가도 보석 같은 카리브를 품은 이 명당을 지나다가 ‘캬! 여기다! 우리 여기에 집을 세우고 살자!’하고 뿌리를 내린 건 아니었을까?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툴룸 유적지

 

사람들은 늘 두려워하는 것을 신으로 만들고 자기의 유익을 바라며 절한다. 아마도 툴룸에서는 먼 나라를 돌며 물건을 사고파는 무역선을 맞는 일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툴룸 사람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바람’이었으리라. 사람들은 그런 신의 노여움을 피하고 자 그들의 삶에서 가장 높은 곳에 제단을 쌓았다.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신을 모셨을 거다. 이제 그 신전은 한 면의 벽만을 남겨 놓고 눈부시게 푸른 바다에 온몸을 맡겼다.

 

위에서 바라본 툴룸의 바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카리브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깨끗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 저 멀리서 낚시하는 새 한 마리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바다를 감시하던 이들은 과연 일하기나 했을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마음에 새겨두고 싶었다

 

다들 물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고 해서 수영복을 입고 왔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한 시간이 넘도록 해변에 앉아 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툴룸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조용히 담고 싶었나 보다.

바다는 조용히, 그리고 묵직하게 저 멀리서 다가오더니 이내 얇은 파도가 된다. 신나게 놀고 있는 유럽 여자애들의 허벅지에 부딪치거나 가발을 쓴 멕시코 할머니의 엉덩이를 강타하기도 한다. 바위 사이로 조용히 사랑을 나누던 부부를 힐끔 엿보기도 한다.

 

하늘이 걷히고 유적지 하늘 위로 붉은 노을이 떨어진다. 바다의 색은 더욱더 깊어진다

 

어느덧 이곳도 닫을 시간이 됐다. 안전요원은 물놀이하던 사람들을 모두 유적지 위로 올려보낸다.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던 해변이 순식간에 고요한 모습을 되찾았다. 마치 도사나 산신령이 나오던 만화에서의 ‘무릉도원’처럼 말이다.

사실 어젯밤, 우리에게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마음 깊숙이 무거운 철근 하나를 심어 놓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아름다운 툴룸의 바다 앞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감정 소모였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마음도 상쾌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툴룸의 또다른 해변

 

다시 자전거를 몰았다. 이번에는 해변 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아무 데나 자전거를 세우고 풍경을 감상했다. 그렇게 우리는 툴룸의 숨겨진 바다의 한 조각까지 마음껏 누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해변을 두고 그저 돈을 아끼기 위해 저 멀리에 있는 센트로에서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건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해변에 있는 호스텔을 예약했다. 내일은 작은 정원처럼 바다를 품고 있는 호스텔에서 툴룸의 바다-천 개의 눈과 천 개의 별들을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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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와 신애

찬수와 신애

비싼 웨딩드레스, 메이크업, 오글거리는 스튜디오 웨딩사진 촬영과 맞바꾸며 6개월간 중남미로 떠났던 배낭 신혼여행.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동행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60년을 어떻게 함께 해야할 지를 나누었습니다.

* 블로그 : pinkcham.blog.me
찬수와 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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