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달리는 크루즈 승무원 #2 – 미국, 호놀룰루

‘열심히 일한 당신 마셔라’. 이 말은 우리 크루들의 모토다. 일이 힘들다고 그냥 방에 들어가 자 버리면 심적으로 더 지치게 된다는 것. 이 장소는 Crew Bar로 불리지만, 사실 Bar는 옆에 따로 있다. Crew Recreation Room이 정식 명칭이다

 

 

아시아로 향하는 크루즈 그리고 첫 번째 이별

 

승무원으로서 크루즈에 합류한 지 벌써 12일이 흘렀다. 아시아 진출을 준비하기 위한 크루즈 내부 리모델링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미 대부분 작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숟가락만 얹는 정도였지만, 끝으로 갈수록 더 힘들어졌다. 이미 공사는 예정보다 지체된 상황이었고, 공사를 마무리하느라 평소보다 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서 내 모든 동료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터질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마무리하는 게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리모델링은 끝났고 우리는 멕시코 크루즈를 마지막으로 아시아로 향하게 됐다.

 

이번 엔세나다를 마지막으로 며칠 뒤 도착할 L.A에서는 같이 트레이닝 과정을 수료한 7명 중 5명이 다른 배로 떠난다. 그들과 함께할 엔세나다에서의 마지막 Port day. 라파엘(멕시코), 아나(우크라이나), 데니스(페루), 매튜(남아공), 로렌(남아공), 그리고 걸슈윈(남아공) 이중 데니스, 매튜, 로렌이 다른 배에서 첫 실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굿바이 회식하러 가는 중

 

리모델링 작업은 힘들었지만 동료들끼리 똘똘 뭉쳐 일하다 보니 동료애가 남달라졌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함께했던 사람들이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했던가. 몇 년 동안 크루즈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던 첫 번째 계약은 특히 어렵기만 한 시간이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연락하면서 가장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리모델링 때문에 자주 나갈 수 없었던 우리는 다시 한번 엔세나다에 내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음식이다!’  멕시코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라파엘. 자신이 호감을 느끼던 아나에게 음식을 추천해주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사진 음식을 찍으려는 나에게 왜 그걸 찍고 있냐며 자기와 아나를 함께 찍어달란다. 아나 혼자 들고 찍어도 되는데… 타코 프랜차이즈나 이태원의 멕시코 음식점에서 몇 번 먹어봤지만 오리지널 타코는 처음이었다. 타코만 주문하면 토르티야에 치즈를 녹이고 기본 고기(Beef, Pork, Chicken 등)만 넣어서 나온다. 기타 소스와 아보카도 같은 토핑은 자기 입맛에 맞게 적당히 잘 넣어 먹으면 된다

 

멕시코는 음식마저도 컬러풀하다. 이렇게 예쁜 음식은 아까워서 못 먹겠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식 이름이 Enchiladas였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멕시코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입맛에 잘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특히 한국에서 먹는 멕시코 음식은 양도 적고 비싸기까지 해서 어지간해선 가지 않는다. 하지만 현지에서 맛본 멕시코 음식은 새로운 맛이었다.  ‘원조 맛집’을 찾는 이유가 이런 거였나. 엔세나다에서는 오리지널 멕시코의 맛을 경험한다는 생각으로 챙겨 먹었다. 평소 자주 안 먹던 음식도 먹게 하는 건 여행의 힘일 게다

 

우리는 조촐한 회식을 마치고, 배로 돌아갈 팀과 시내에 머무는 팀으로 갈리게 되었다. 나와 몇몇 동기들은 그동안 Wi-Fi에 목이 말랐기에, 한 카페를 잡고 인터넷 서핑을 즐기기로 했다.

 

호놀룰루-크루즈여행

동기들이 떠나기 전날 밤. 안타깝게도 일이 너무 늦게 끝나는 바람에 굿바이 파티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 우리를 현장까지 찾아와 작별 인사를 건넨 동기들. 이때는 이 사진이 마지막 단체 사진이 될 줄은 몰랐지..

 

자, 아쉽지만 이제 떠나야 할 사람들은 떠나보냈고, 내일이면 드디어 출항이다. 상하이까지는 25일이 걸리는데 그동안 들리는 곳은 고작 대 여섯 군데뿐이다. 바다에 떠 있어야 하는 시간이 25일중 19일 가까이 된다는 말이다. 리모델링 건으로 심신이 상당히 지쳐있었지만 본격적인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 앞으로 다가올 긴 항해와 새롭게 시작될 Chinese Season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드디어 25일간의 긴 크루즈가 시작되었다. 항해가 시작되면 상당히 힘들어질 거라는 무성했던 소문과는 달리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일터는 한가해졌다.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되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일도 손에 잡혔고, 무엇보다 내가 맡았던 면세점은 승객들이 갈수록 상품에 대한 호기심이 줄면서 한가할 때가 많아졌다. 나는 그런 시간을 이용해 영어, 일본어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달 정도였지만…

 

 

호놀룰루에서 만난 귀인

 

크루즈 생활은 무난하게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다만 나에겐 한 가지 큰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하선 허가증(I-95) 때문이었다. 미국 승무원들에게 하선 허가증은 비자와는 별도로 취급되는데, 지난 LA에서 받았던 허가증 심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첫 번째 계약이기 때문에 미국 땅에 내리면 어디로 도망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나 말고도 첫 번째 계약 중인 대부분 승무원이 불합격이었다. 출항 후 첫 번째 머무를 호놀룰루에서 하선 허가증 재심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다시 불합격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흘러서 우리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진행될 심사 때문에 잠자리도 설쳤다. 새벽 6시. 나를 비롯해 하선 허가증을 못 받은 승무원들이 크루 바 레크리에이션 룸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함께 기다리는 동료들과 서로 응원했더니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내 차례.

면접관은 5명이었다. 과연 나는 누구와 면접을 보게 될 것인가.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 앉아 있는 동양계 면접관과 맞닥뜨렸다. 그는 중국계일까? 아니면 일본계? 잠깐이지만 온갖 생각들이 스쳐 갔다. 그러다가 가슴팍에 있는 면접관의 명찰이 들어왔는데, 명찰에는 분명 ‘KIM’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Good morning Sir!”
“….”

 

5초간 정적이 흘렀고, 시간은 꼭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한국분이시네요?”
“….!!!”

 

희망이라는 단어를 본 것은 나뿐이었을까?

 

“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건우 씨의 우는 비 우를 쓰시나요?”
“아닙니다. 임금 우였고 지금은 하우씨 우로 바뀌어서 쓰입니다!”
“그렇군요. Landing Permit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불합격 받았네요. 처음 계약이신가 보죠? 제가 내릴 수 있게 해드릴게요. 저기 뒤에 있는 남자분께 가서 새 허가증을 한 장 달라고 해서 다시 작성해 오세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기쁜 마음에 뭐라 길게 말도 못하고 “네!” 라고 소리치고 한걸음에 허가증을 다시 작성했다. 1분도 걸리지 않았을 빛의 속도로 양식을 완성하고 같은 면접관 자리로 줄을 섰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내 차례.

 

“(허가증을 읽어보시면서) 이 건우씨.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한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승무원들이 하나, 둘씩 많이 보여서 정말 반갑습니다. 크루즈 일이 힘들다고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포기하지 말고 힘내시길 바랍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우리 한국 분들은 제가 도와드릴 겁니다. 자. 다 됐습니다. 이제 미국 땅에서는 어디서든 내릴 수 있을 거예요. 건강히 잘 있다가 돌아가십시오.”

 

외국에서 한국인들을 만나고 이렇게 감동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고맙고 감사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감사하다는 말만 수차례를 건네고 다음 사람을 위해 나와야 했다.

 

‘나 이제 나갈 수 있는 건가?! 오예!’

 

입사 동기인 윈스턴 외에는 모두 3, 4번째 계약이라 호놀룰루는 몇 번씩 와본 친구들이다. 자기들이 호놀룰루를 보여주겠다며 더 신났다

 

대체 며칠만의 외출인가 말이더냐. 다들 놀러 나가는 것보다 배에서 먹을 군것질거리를 사는 게 먼저다. 나도 미국 인턴십 이후로 월마트가 오랜만이라 물 만난 고기처럼 열정적으로 쇼핑했다

 

카지노 팀이나 면세점 팀에게 호놀룰루는 일종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크루즈는 새벽에 항구로 들어와 밤 11시가 되면 출항하는데, 그동안 승객들은 배 밖으로 나가서 관광을 즐기거나  배에 남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때 다른 팀들은 크루즈 잔류 승객들을 응대해야 하지만 카지노나 면세점은 정박 중에는 국제법상 문을 열 수 없기 때문에 크루즈에서 따로 할 일이 없다. 하루 종일 밖에서 쉬다 올 수 있는 거다. 배 안에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크루에게 온종일 휴무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하와이에서 가장 크고 볼거리가 많다는 호놀룰루에서의 오프 (OFF)는 감히 축복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하선 심사를 극적으로 통과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기대감에 벅차 올랐다.

 

하와이 최대의 쇼핑몰로 잘 알려진 알라모아나에서 여러 동료를 볼 수 있었다. 알라모아나에서는 정기적으로 전통음악이나 춤을 선보이는데, 운 좋게 시간이 맞아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이젠 코코넛 브라를 차고 훌라춤을 추는 전통은 이런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호놀룰루가 처음이었던 나는 적당히 쇼핑을 한 뒤에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쇼핑몰에서 발목이 잡혔다. 쇼핑에 빠진 동기들을 기다리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들은 아무리 길게 쇼핑을 한다고 해도 30분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다. 나를 비롯해, 일찌감치 쇼핑을 마친 남자 동기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Wifi를 찾아서 인터넷을 해보지만, 이것도 2시간이나 하고 있으려니 답답한 노릇이다. 하…

 

 

기다리는 자, 라파엘.  그는 여자들과는 쇼핑 오는 게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분명히 2시간 쇼핑하고 11시 30분까지 모이자고 했는데 12시가 지나야 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혈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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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스와 기름 두 방울

잭스와 기름 두 방울

개봉동 서울 촌놈이 호주를 횡단했고 미국 33개 주를 운전했으며, 태평양도 건넜다. 지금까지 32개국을 품에 담았다.

"The secret of happiness is to see all the marvels of the world, and never forget the drops of oil in the spoon." -The Alchemist-

* 인스타 : instagram.com/jax_douner
잭스와 기름 두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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