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ana Blues #5 – 쿠바, 바라데로

 

티켓 전쟁

 

마탄사스의 버스 터미널

 

아침 8시로 세팅해놓은 알람은 세차게도 울렸다. 8시. 피곤함에 찌들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일으키기에는 어쩌면 조금은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지체하지 않고 일찍 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바로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어제의 교훈 때문이었다. 어제처럼 시간을 지체해서 예상치 못한 곳에 예상치 못한 시간에 도착하기라도 한다면 어제와 같은 최악의 상황은 얼마든 벌어질 수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떠날 채비를 했다.

일단 당장 생각해놓은 계획은 매우 간단했다. 버스를 타고 바라데로(Varadero)로 이동해 하루나 이틀을 묵고 시엔푸에고스(Cien fuegos)로 향하는 계획이었다. 물론 이 계획에는 현지인 버스(Local Bus)를 타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있었는데,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값비싼 외국인 전용 버스는 꿈같은 얘기다. 반드시 저렴한 현지인 전용 버스를 타 야만 했다. 그렇게 대략의 계획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 마탄사스 터미널로 향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어깨를 먼저 넣고 목소리 크게 내는 게 질서라면 질서다. 어쩌겠는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나는 쿠바의 너무 깊은 곳에 와버린 것을…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든 아낙네들과 여러 모양의 군중들이 닭장만 한 매표소를 앞에 두고 버스 티켓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차편이 워낙 한정돼 있다 보니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동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이라고 해도 차편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쿠바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가 만들어낸 광경이다.

 

‘저리 비켜 내가 먼저야’
‘울티모 페르소나?! 울티모 페르소나?!’ (ultimo persona, 마지막 사람?)

 

버스를 타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눈빛과 의지는 세상 누구보다 간절해 보였고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나도 넋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치열한 버스 티켓 전쟁에 참전했다.

 

버스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얼마간 쿠바노들과 치열하고 뜨겁게 피부와 피부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밀렸는지 아니면 밀었는지, 어느새 내가 제일 앞줄까지 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서가 사라져버린 이곳에서 난 주저 없이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지금 생각해도 이걸 받아 든 매표소 직원의 기분이 어땠을까 잠시나마 창피해 본다-과 ‘대충 거슬러서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지폐 몇 장을 거의 던지다시피 터미널 직원에게 넘겼다. 그리고 처절하게 ‘바라데로’를 연신 외쳤다. 그러나 직원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외국인은 외국인 전용 버스를 타야해. 어서 빠져’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리고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고 갈증에 타들어 갔던 목은 쩍쩍 갈라졌다. 내 앞에서 뭐라 뭐라 설명하는 매표소 직원에게 변명할 말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득의 여지가 없는 그의 확고한 원칙론에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신분증과 땀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지폐 몇 장을 주섬주섬 챙겨서 터벅터벅 줄에서 빠져나갔다. 그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쿠바노들이 별안간 매표소 직원에게 이 친구에게 버스표를 팔라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부터 봤어. 얘, 지금 1시간째 여기서 줄 서 있었다고!’
‘그래! 표 좀 팔아줘 불쌍하잖아’

 

하지만 쿠바노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매표소 안의 대법관님께서는 눈썹을 올리며 원칙상 어쩔 수 없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외국인 버스 매표소 방향을 가리켰다.

 

나를 대신해 현지인 버스표를 얻어주려고 했던 고마운 아주머니. 이렇게 선한 인상을 하고 처음 보는 여행자를 위해 끝까지 싸워주셨다

 

표는 구하지 못했지만 쿠바사람들의 후끈한 온정에 감격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티켓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에 깨끗하게 승복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나와 같이 싸워준 친구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의 인사를 하고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아주 익숙하고도 귀찮음을 부르는 그 단어가 내 귓전을 때렸다.

 

 

청춘의 마음을 녹인 바라데로

 

어쩌다보니 친구가 되어버린 택시기사 아저씨. 그들의 친구가 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치노! (Chino : 본래 중국인을 뜻하는 말이나 동양인을 비하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텐데 무슨 이유였는지 택시기사에게 난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설명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운을 떼었다.

 

‘저는 한국인이에요! 중국인이 아니라구요’
‘아! 저런, 미안해. 남한에서 왔구나!’

 

능글맞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쿠바 택시기사는 나를 어느샌가 친구(Amigo)라고 부르며 목적지를 묻는다.

 

‘저는 바라데로(Varadero)까지 가는데요?’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이 차가 바라데로로 가는 택시야. 20CUC만 내면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이때다 싶어 미끼를 던졌겠지만, 나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라는 걸 이 아저씨만 몰랐나보다. 어차피 택시를 탈 생각도 없었거니와 한번 실패를 맛본 후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별 기대도 없이 세 손가락을 피고는 택시기사를 향해 ‘3CUC’이라고 덤덤하게 말해버렸다. 제시한 금액의 반의반도 안 되는 황당한 금액을, 아주 당당하게 제시해버렸으니, 내가 생각해도 골 때리는 처사였다. 내가 택시기사라도 어이가 없어도 한참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웃기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약간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CUC이라… 너 진짜 웃긴 녀석이구나. 잠시만 기다려봐’

 

협상을 마친 택시기사는 잠시 나를 두고 어디론가 향했다. 몇 분 뒤 택시기사는 딱 봐도 관광객 냄새가 나는 3인 가족을 역 안에서 데려오더니 택시에 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3CUC 내고 가는 걸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를 냈는지도 모를 관광객 가족들과 함께 바라데로로 향했다.

날씨, 바람, 지출 모든 것이 완벽했다. 쿠바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자 카리브 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는 바라데로로 간다고 하니 ‘내가 참 멀리도 와 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세상 아름다운 바라데로 해변의 모습

 

약 1시간여를 달려서 도착한 바라데로는 이전에 경험했던 쿠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도로, 깨끗한 거리,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집들까지… 한 나라 안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가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심지어 블록마다 들어서 있는 멋스러운 호텔과 리조트의 위용은 이곳이 정말 자본이 흐르는 쿠바 제일의 관광도시라는 걸 느끼게 했다.

 

바라데로에 거주하는 쿠바노들은 비교적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세련된 바라데로의 풍경은 어느새 쿠바의 분위기에 무뎌져 버렸던 나의 감성을 다시 타오르게 했다. 한동안 가져왔었는지도 잊고 있었던 카메라의 스트랩을 팔목에 감고 이곳저곳을 분주히 다니며 기록했다. 때로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내 눈에 오롯이 담아보기 위해 멍하니 앉아 있어 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하루 정도는 이곳에서 쉬며 재정비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순식간에 들었다. 결국 큰맘을 먹고 숙소에서 제대로 된 비용을 치르고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단했다.

 

어쩌다 마주하게 된 바라데로의 햇살이 내리쬐는 골목. 나는 이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아름답지만 자비는 없었던 그곳

 

바라데로의 교통수단. 올드카 사이로 말 택시가 눈에 띤다

 

‘흠.. 일단 지금 당장 25CUC의 여유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25CUC 이하의 방을 구해서 제발 제발 편하게 하루만 자자. 방값이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라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대문이 활짝 열려있던 -다른 카사보다는 조금은 만만해보였던- 카사 초인종을 누르자 곧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미안하지만 예약이 다 찼어 지금 성수기라 방 구하기 어려울걸?’
‘아.. 정말? 바라데로의 평균적인 카사 1박 가격은 어느 정도 되는데요?’
‘지금이 성수기의 피크라 못해도 40CUC은 생각해야 할 거야’

 

나는 처음에 헷갈려서 14CUC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가 말한 ‘보통 40CUC’이라는 말에 오늘도 역시 순탄치 않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노숙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분주히 다음 카사, 그리고 그다음 카사, 그리고 그다음 다음 카사의 초인종을 눌러 영혼을 건 협상에 돌입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바라데로 해변의 일몰.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보내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빈방을 찾아 헤매었으나 아까 너무 비싸서 포기했던 방조차도 이미 다 차버린 상태였다. 동네의 카사란 카사는 이 잡듯이 다 뒤졌지만 내 몸 하나 뉘일 방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방만 있다면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편하게 자고 싶었을 정도다. 하지만 성수기 시즌, 저녁의 바라데로에는 자비란 없었다. 이 난처한 상황에 재빨리 대책을 마련해야했다. 그때 나쁘지 않은 묘안이 떠올랐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외국인 버스터미널(Viazul)에서 노숙을 하자 거긴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그렇게 해서 찾아간 터미널에서 나는 의자에 누워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마법처럼 잠이 솔솔 오게 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린 내 가방을 베고 누워보니 제법 편했고, 사이즈도 잘만했다. 그렇게 모든 것에 만족하며 터미널 노숙에 돌입했다.

자리에 누운 지 1시간쯤 흘렀을까…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뭐라 뭐라 말을 걸었다.

 

‘막차가 방금 이곳을 떠났어. 어서 나가’
‘네? 비아술 터미널은 24시간 아닌가요?’
‘이곳은 아니야. 어서 나가. 우리도 퇴근해야 해’

 

역시나 오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말에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후… X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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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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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하는 모든 곳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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