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ana Blues #4 – 쿠바, 마탄사스

 

돈이 별로 없습니다,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낭패였다. 집도 절도 정보마저 없는 마탄사스(Matanzas)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스산했다. 게다가 가로등이 듬성듬성 부자연스럽게 꽂혀있어서 삭막함이 더해졌다. 이런 마탄사스의 첫인상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이미 나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거처에 눕고 싶다는 간절함이 온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밤이 더 깊어지면 여러모로 더 힘들어질게 분명 했기에 한시라도 빨리 숙소를 마련해야만 했다.

지갑을 확인해보니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지폐 몇 장만이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 숙박업소에서 제값을 주고 잘 경우 한동안 생활비를 화끈하게 조여야 한다는 계산에 이르렀다. 강단을 내려야 했다.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하던 중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쳤다. 바로 내 앞을 지나는 모든 마탄사스의 주민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해보는 거였다. ‘설마 이 많은 마을 사람 중에서 하룻밤 정도 지붕을 내어줄 사람이 없겠냐’는 무모한 긍정이었다.

 

마탄사스의 중심가.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는 관광도시답게 거리는 깔끔했다. 유난히 정열적이던 이곳의 사람들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아까 기차에서 만난 올란도 아저씨에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페인어 문장 몇 개를 받아서 적어두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공개하자면,

 

No tengo mucho dinero(돈이 별로 없습니다).
Una noche por favor para dormer(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아주 요긴하게 쓰일  두 문장이 되겠다.

 

이 두 개의 문장만 믿고 나는 사람이 보이는 족족 치열하게 들이대기 시작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의 간절함을 어필했지만 대부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지나갔다. 레게 머리를 한 청년은 내게 길고 까만 중지를 들어 보이며 건승(?)을 빌어주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밤이 깊어가면서 메인스트리트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었다. 혹시나 내게 온정의 손길을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그 누군가를 애타게 바라며 메인스트리트를 벗어나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쿠바에서는 올드카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마탄사스의 골목 풍경

 

그런데 골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험상궂은 얼굴을 한, 딱 봐도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어 보이는 무리가 삽시간에 나를 에워쌌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어눌한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 뭘 찾고 있는 거야?”
“난 지금 집을 찾고 있어. 혹시 근처에 숙박업소(카사)가 있니?”
“음… 두 블록 후에 우회전해. 그럼 몇 개 있어”
“고마워! 그럼 나 이제 가볼게”
“가긴 어디를 가. 우리 이제 친구잖아? 아니야?”

 

그의 말이 입술에서 떨어지자 등줄기 아래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물론 친구지. 그렇지만 난 이제 가봐야 해”
“그래? 그럼 친구, 내가 너 도와줬으니까 니 핸드폰을 우리에게 주고 가”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핸드폰을 뺏긴다면 나 자신을 너무 원망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는 핸드폰에 있는 지도에만 의존해서 여행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없다면 여행 자체가 틀어져 버린다. 나는 당장 핸드폰도 지키고 안전해질 방법을 계산해야 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도망’이었다.

나는 뛰었다. 그들은 비열한 웃음과 함께 큰 소리로 나를 조롱하는 몇 가지 단어들을 뱉었다. 그들 쫓아오지 않았고,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순찰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해피엔딩을 직감했다. 그제야 요동치던 심장이 진정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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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에서도 치안 좋기로는 1순위로 꼽히는 쿠바. 24시간 도시의 메인 스트릿이나 골목골목에서 쿠바의 밤거리를 수호하고 있는 경찰관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다. 저녁 점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번 찾아온 귀인(貴人)

 

기운이 쭉 빠진 채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인물이 훤칠하고 딱 봐도 선해 보이는 청년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보면서 올란도 아저씨가 전해준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약간 당황하더니, 고민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이 순간 직감했다. 오늘 이 친구는 내 은인이 될 것이라는 걸. 잠시 후 그는 이내 운을 떼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식구가 너무 많아서 너까지 재워주긴 어려워.
대신 싼 가격의 카사를 찾을 때까지 같이 찾아줄게”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나는 정말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도움을 받게 되자 그 기쁨은 배가 됐다. 그 청년의 이름은 노엘. 나이는 25살, 밤늦게까지 부모님의 가게를 돕고 먼저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와 함께 마탄사스의 새벽 거리를 종횡무진 했다. 나라에서 공인한 숙박업소임을 증명하는 마크인 카사 파티쿨라(Casa particular)가 보이는 모든 집의 초인종을 눌러 ‘합리적인 가격’을 위한 흥정을 시작했다. 돈 없는 죄인의 변호는 노엘이 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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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공인한 외국인용 숙박업소라는 뜻의 카사 파티쿨라 마크. 엄격한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카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인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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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각 도시에는 새로운 길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집들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다

 

카사의 주인들은 나와 노엘이 제시한 터무니없는 가격에 손사래를 쳤고 박대하기 일쑤였다. 내가 돈이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사실 마탄사스의 숙박 요금이 너무 비싼 탓도 있었다. 아바나의 저렴한 카사에 비하면 3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노엘은 마탄사스가 캐나다 사람들 사이에서 관광도시로 입소문이 난 이후부터 버블현상이 심해진 탓이라고 설명했다. 노엘과 함께 10여 군데 이상의 카사를 전전했지만 기대했던 ‘Good Deal’은 없었다.

 

마탄사스의 애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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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식료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적지않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침부터 식료품을 사기위해 거리로 나온 마딴사스 주민들

 

그러자 노엘이 하는 수 없다며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바로 노엘의 여자친구네가 운영하는 카사에서 나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하고 최대한 가격을 깎아보자는 거였다. 사실 처음부터 노엘이 이 방법을 제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자친구네가 운영하는 카사는 마탄사스 안에서도 제법 비싼 축에 속해서다. 애초에 나에게 추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노엘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자며 나를 독려했고, 여자친구네가 운영하는 카사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노엘은 나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하면서 가격 흥정을 시작했다. 카사에는 현재 투 베드 룸 밖에는 없고 가격은 40CUC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노엘의 친구이기도 하고 나의 안타까운 사연과 겉모습에 감동해 20CUC에 해주겠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노엘은 나보다 더 기뻐하면서 연신 아주머니의 볼에 입맞춤해댔고,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지구반대편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으로부터 진한 감동했다. 생판 모르는 외국인 여행자에게 길에서 보여준 그의 노력과 헌신은 아름다웠다. 쿠바의 모든 청년을 존중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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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를 떠난 지 12시간이 넘어서야 내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만큼이나 잊을 수 없었던 깔끔하고 훌륭한 카사였다

 

노엘은 마지막 순간까지 ‘꼭 계획한 여행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당부했다. 그가 뒤돌아 나가려고 할 때 나는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노엘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는 가방 깊숙이 눌러 두었던 인스탁스 카메라를 꺼냈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두 영혼의 앞날을 축복하며 사진을 선물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내게 보여준 대가 없는 호의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노엘과 그의 여자친구 아리아나, 마음씨만큼이나 웃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나는 사진을 받아 들고 기뻐하던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노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악수를 건넸고 노엘 또한 기쁘게 악수를 받아주었다. 나는 노엘과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을 마무리했다.

 

기대 이상으로 과분한 카사의 침대에서 편하게 누웠다. 길었던 하루를 돌아보며 나를 도와줬던 수많은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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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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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하는 모든 곳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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