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가 마음에 들었다
이집트 최대 관광지인 룩소르(Luxor)로 이동할 때는 버스를 이용했다. 카이로의 버스터미널은 나름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임에도 굉장히 한적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대합실은 조명이 별로 없어 매우 어두웠다. 9시에 출발한다는 버스는 20분이 지나서야 탈 수 있었다.
외국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야간 버스라 혹시나 싶어 가방은 발아래에 놨다. 가뜩이나 불편한 좌석인데 가방까지 더해지니 불편했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이름도 모를 작은 마을을 계속해서 지나쳤다. 카이로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의 풍경을 만나게 되니 여행의 설렘이 솟구치는 듯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사건이 터질 줄은 전혀 몰랐다.
버스는 룩소르 중심지가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잠시 택시 아저씨들을 뿌리친 후 호텔까지 걸어갔다. 지도와 위치가 달라 가는 동안 조금 헤매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체크인까지 완료했다. 싸고 좋은 방에서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조식이 10파운드라고 해서 아침이나 먹고 잘까 싶어 지갑을 챙겨 나가려고 했는데, 정말로 그러려고 했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가방을 뒤지다가 불길한 마음에 재빨리 거리로 뛰어나갔다. 이제 도착한 낯선 동네를 뛰고 또 뛰었다.
지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지갑을 가방에 넣어둔 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평소엔 돈과 카드를 분산해서 잘도 보관했는데 그날따라 같이 보관했던 게 문제였던 걸까? 설상가상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다니엘이 더는 이집트 돈을 인출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내가 대신 찾아 120달러와 바꿨는데, 지갑에는 그 돈도 함께 들어있었다. 어차피 조만간 수단 비자를 신청할 계획이어서 그때 쓸 생각으로 그냥 둔 거였는데…
아무튼 그날은 지갑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훔쳐갔는지 아니면 내가 떨어트렸는지 모를 그 지갑엔 140달러와 100유로, 은행카드 2장이 들어있었다. 물론 다른 은행카드 1장과 별도의 비상금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지갑을 잃어버렸단 충격은 매우 컸다. 오전 내내 지갑을 찾아다니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도 했지만 끝내 지갑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여행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틀째가 되던 날 오후부터 천천히 시내를 돌아다녔다. 룩소르는 문명이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주 시골이란 얘긴 아니지만, 카이로와 같은 대도시와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마차가 수시로 지나다니고, 오래된 건물과 그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에는 여행자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관광지이지만 “웰컴!”을 외치는 여러 사람의 환영 인사에 손이 절로 들린다. 말과 당나귀가 수시로 다니는 골목에서는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그동안 관광지라고는 단 한 곳도 가지 않았음에도 오래된 동네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늦은 밤 좁은 골목을 지나칠 때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면서 노는 사람들이 날 붙잡았다. 잠깐 여기서 앉았다 가라고.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못 말린다. 어느새 다가온 아이들은 사진 프레임 안에 들어가려고 서로 밀치며 자리를 차지했다. 한 아주머니는 아이 사진도 찍어 보라고 하고, 자기네 집안도 찍어 보라고 등을 떠민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이 반긴다. 그것보다 여행자를 즐겁게 하는 게 더 뭐가 있을까. 룩소르가 마음에 들었다.
사막의 핫(뜨거운) 플레이스를 찾아서
숙소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 2명을 만났다. 룩소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 한국인 여행자들은 조금 특별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던 사람들로, 이번에는 카이로에서 자전거를 산 뒤 아프리카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도 아니었는데 무척 반가웠다.
다음날 우리는 서안지구(West Bank)로 향했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같은 룩소르의 유명한 관광지는 대부분 이 서안에 있다. 나일 강을 건넌 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떤 교통수단도 이용하지 않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택시를 타지 않겠냐고 물었던 아저씨는 끝내 포기하고 돌아갔다.
태양은 뜨거웠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물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유적지는 멤논 거상이었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 거상은 야외에 있어 별도의 입장료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룩소르의 10월, 그것도 대낮에는 그림자를 찾아 쉬기 바빠서 멤논 거상은 우리를 오래 붙잡지 못했다.
몇 시간을 걸어 무덤이 많은 언덕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가고 싶었던 곳은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이었는데, 지도상으로는 조금 멀어 보였다. 그나마 가까운 곳은 ‘핫셉수트 장제신전(Hatshepsut’s Mortuary Temple)’인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이동한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핫센수트 장제신전은 이집트 최대 관광지라고는 하나, 유적이나 무덤의 구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오르던 언덕은 이미 무덤 내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 온 상태였다. 그래서 어떤 아저씨는 언덕에 있는 우리를 붙잡기(?) 위해 뛰어오기도 했다. 아저씨는 별다른 말은 없었고 입장료를 내지 않을 거면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드디어 핫셉수트 장제신전 앞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 그것도 산 아래에 이런 번듯한 신전이 있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물론 복원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겠지만…
다른 두 사람은 유적지에는 관심이 없다 해서 나 혼자만 들어갔다. 사실 쿠푸왕 피라미드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실패 경험이 있어 망설였지만, 여기는 입장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50파운드인 데다가 다른 곳보다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외형적으로도 여태까지 봤던 유적지 중 가장 관심이 갔다. 쿠푸왕 피라미드를 200파운드라 들어간 이후 모든 유적지에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핫셉수트 장제신전은 나름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나일 강으로 돌아왔다. 고작해야 1파운드인 데다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걸었을까. 돌아오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코샤리를 먹은 뒤 콜라로 마무리했다. 더위와 먼지를 먹을 때 가장 생각나는 게 콜라였지만, 이미 땀이 다 식은 후라 감동이 덜했다.
코샤리를 먹긴 했지만 늦은 저녁이 되자 다시 배고파 뭔가를 사러 나갔다. 그때 발견한 게 바로 이 샌드위치인데, 내장 여러 부위를 요리한 후 빵에 넣어주는 거라 굉장히 친숙한 맛이 났다. 꼭 순대를 먹는 느낌이랄까. 난 이 맛에 빠져서 매일 2개씩 혹은 4개씩 사 먹었다.
삐끼를 따돌리고 하부 신전으로
룩소르가 좋긴 했지만 질릴 정도로 따라붙는 삐끼와 말도 안 되는 수법으로 꼬시는 사기꾼을 만날 때는 짜증이 났다. 근데 사기를 치는 수법이 너무 뻔해서 웃기다. 대부분 나에게 먼저 다가와 네가 묵는 호텔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기억하냐고 말한다. 당연히 기억날 리가 없다. 그리고는 지금 식재료를 사러 시장에 갈 예정인데 너도 갈 거냐고 하는 어이없는 수법이다. 단순히 꼬시는 것을 넘어 사람을 속이는 거라 사기꾼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법에 웃음부터 나왔다. 일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호텔에서 묵는 사람이라고 해도 순순히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날씨는 정말 더웠다. 숙소에서 온종일 누워 있다가 배고프면 잠깐 나가는 게 일과였다. 지금은 관광객이 별로 없지만 여기는 카이로만큼 관광객이 많은 곳이었을 텐데 동네 주민은 여행자를 볼 때마다 반갑게 맞이한다.
룩소르에 있는 동안 원래 ‘왕가의 계곡’을 가려고 했다. ‘왕가의 계곡’은 룩소르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고 눈에 띄는 무덤이 아닌 외딴곳에 굴을 파서 내세에 평안을 얻으려 했던 왕들의 무덤인데, 단 하나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전부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단 하나의 무덤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사실 투탕카멘은 재위 기간이 고작해야 9년으로 매우 짧은 편이다. 하지만 왕가의 계곡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전된 채로 발굴된 무덤인 데다가 황금마스크가 있어서 유명한 것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굳이 ‘왕가의 계곡’을 가볼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숙소에서 가볼 만한 다른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곳이 ‘하부 신전(Habu Temple)’이었다.
하부 신전을 갈 때는 나일 강을 건너면서 만나는 삐끼를 익숙하게 따돌리고, 마이크로버스로는 못 간다는 택시 아저씨를 무시한 채 마이크로버스에 올라탔다. 적당한 갈림길에서 내려 하부 신전까지 걸어갔다. 막상 하부 신전 앞에 도착해서 보니 매표소를 찾지 못해 잠깐 헤매긴 했지만, 어쨌든 쉽게 갔다. 하부 신전 앞에서도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들어가 보니 상당히 괜찮았다. 고고학이 무지해도 뚜렷하게 남아있는 상형문자와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석상은 대부분 부서져 온전히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른 유적지에 비해 문자와 벽화가 매우 깨끗하게 남아있다. 아주 어렸을 때 이런 상형문자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는데(대부분 미스터리로 빠지곤 했지만) 여기서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했다. 짧은 시간 대충 훑어본 내가 어떻게 평을 할 수 있을까. 뭔가 의무감에 보러 갔던 게 아닐런지. 하부 신전만 보고 곧장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나일 강으로 돌아왔다.
룩소르를 거닐며 일상을 마주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룩소르의 밤을 맞이한다.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몇 없는 외국인이 눈에 띄는지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귀여운 동네 꼬마들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가끔은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볼 수 있다. 동네를 거닐면서 그들의 일상이 보인다.
원래는 한국에서 은행 카드를 받으려고 했지만, 일정이 꼬여서 나중에 받기로 했다. 일단 아스완( Aswan)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집트 비자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수단 비자를 받고 떠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룩소르 역에 가서 다음날 출발하는 열차를 예매했다.
그리고는 룩소르에 며칠 동안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시장을 가봤다. 사실 시장이라고 해봐야 관광객을 위한 뻔한 그런 시장이었지만, 그냥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시장은 요즘 이집트 관광산업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붙잡는 시장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애처로웠지만 이런 기념품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계속 여행할 나에게는 짐이라, 무조건 괜찮다고만 했다.
밤에는 룩소르 신전의 야경을 보고 저녁을 먹었다.